"문장을 줍는다"

 그렇게 소설을 쓴다는 오르한파묵의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만화가 이우일은 에세이집에 "시인은 단어의 수집가다. 소설가는 문장의 수집가다"라고 썼다. 마땅하게도 책의 제목은 '콜렉터'였다. 김소연 시인은 단어를 살뜰히 모아 '마음사전'을 펴내기도 했다.

 아침마다 라디오에서 '말'들이 쏟아진다. 지난해 8월 4일 더불어민주당(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최재천 정책위의장은 'MBC 시선집중'에 나와 '재벌개혁'을 논하며 '성장친화적인 진보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같은 당 유승희 최고위원은 'CBS 뉴스쇼'에 나와 새누리당 심학봉 의원이 '성폭행'을 저질렀다며 "당장 의원직을 사퇴하라"고 부르짖었다. 나는 '시선집중'이니 '뉴스쇼'니하는 라디오 시사대담 프로그램의 이름이 참 적절하다고 생각하며 라디오 스크립트를 묵묵히 정리했다. 

 정치부 기자는 이렇게 흘러나오는 '말'들을 줍는데부터 시작한다. 아침마다 이런저런 라디오 방송국의 홈페이지를 들락거렸다. 중요한 부분을 볼드처리하고 제목을 뽑았다. 커서로 스크립트를 긁어가며 빠르게 읽었다. 말들은 차곡차곡 쌓여 맥락을 이루었다. 선배는 이따금씩 의원과 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을 확인하면서 이야기의 뒷배경도 물었다. 당시 나는 국회에 출입한지 이틀째였다. 아이스라떼나 쪽쪽 빨아마셔도 무능이 용인되는 시간이었다. 다만 언제까지 무능할 순 없기에 시시각각 초조해했다. 사방이 온통 회색 파티션이었다.

더불어민주당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책회의 장면. 정치인들은 아침마다 공개회의에 나와 기자들에게 주요 메시지를 던진다.

기자의 '메트로놈' 국회의원

 국회의원은 참 많다. 그 모든 의원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말을 한다. 오전 9시. 더불어민주당이 각종 회의를 여는 시간.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고 이어폰과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넣는다. 국회 본청 2층 당대표 회의실이나 원내대표 회의실로 올라가 간이의자에 않는다. 대부분의 언론사는 아침회의를 실시간으로 보고한다. 당시 지도부였던 문재인 전 대표와 이종걸 원내대표 등 회의 참석자의 발언을 실시간으로 받아친다. 한 의원이 입을 열면, 마치 카라얀의 지휘를 받는 오케스트라처럼, 40여명의 기자가 동시에 노트북을 친다. 말의 속도 변화에 따라 리듬감 있게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울린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 뉴시스.

대개 문재인 전 대표의 발언으로 회의가 시작된다. 아직은 '아다지오(느리게)'다. 문 전 대표는 힘 있는 목소리로 진중하게 말을 한다. 헨델의 아리아처럼 느리기에 부담없이 칠 수 있다. 문 전 대표는 좋은 지휘자인데 말의 속도가 일정하기 때문이다. 회의실에는 규칙적으로 '다다다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울린다. 다만 발음(?)이 분명치 않아 나같은 놓치는 '단어'가 종종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원내대표. 뉴시스.

 손가락이 조금 풀렸다 싶으면 이종걸 원내대표가 입을 연다. 이 원내대표는 아다지에토(아다지오보다 빠르게)'다. 문 전 대표 보다는 빠르지만 결코 다른 의원에 비해 속도감 있지는 않다. 이 원내대표 역시 훌륭한 지휘자인데 가끔 재빠르게 말을 한다. 게릴라 같은 급습에 손가락 관절이 놀라긴 하지만 곧 따라잡는다. 문제는 '유머감각'이다. 간혹 웃음이 터지도록 농담을 던지는데 본인은 천연덕스럽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한다. 현장 상황을 그대로 보고해야하는 입장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농담을 글로 설명해봤자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최재천 전 정책위의장


 극강의 최종보스는 최재천 전 정책위의장이다. 그는 장르가 다른데 '쇼미더머니'다. 래퍼 기질이 다분한 최 전 의장은 예측할 수 없는 속도변화와, 리듬, 억양을 갖췄다. 엄청난 속도로 박근혜 정부의 실정을 랩한다. 게다가 매우 똑똑한 분이라 발언에 각종 통계와 수치 그리고 외국어 등이 담겨있다. 손가락이 부러져라 컨트롤과 시프트를 누르고 한영변환을 오가다 보면 어느새 무아(無我)의 경지에 오른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최 전 의장은 '나쁜남자'기질도 다분하다. "의원님 너무 빨라요"라 불평했더니 "막내 기자가 그것도 못 쳐?"라고 답한 뒤 다음부터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어느날은 원내대표실 앞 바닥에 앉아 정치인을 기다리는 기자들에게 "왜 이렇게 고생하느냐. 의자라도 놔주겠다"며 자리를 봐두기도 했다. 아쉽게도 벽에 소화전이 있어서 의자를 놓지 못했다. 그는 핫핫 웃으며 "소화전 앞에 의자 가져다 놓으면 여기 누군가 또 기사 쓸 거 아냐? 법 안 지키는 국회의원이라고…" 설명했다.
고승혁 기자의 블로그

고승혁 기자 marquez@kmib.co.kr

[관련기사 보기]
▶[고승혁의 아장아장정치부] 일단 정치부 기자가 됐는데 국회는 어떻게 들어가더라?



더 보기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