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옥씨의 미술 바구니] 16. 금물감 추상화... 동양화 전통 잇는 걸까, 파괴하는 걸까 기사의 사진
'Plan B', 2016, 장지에 채색, 182×454cm
동양화란 무엇일까요.

역사상 최초의 화가로 이름을 남긴 이는 4세기 중국 동진의 고개지입니다. 그가 남긴 ‘여사잠도권’은 궁궐의 여인이 지켜야할 도리를 유려한 필치로 은유적으로 표현한 수작이지요. 고개지 이래 동양화의 전범은 수묵화였습니다. 융합이 키워드가 된 21세기에도 동양화, 서양화의 면면한 이분법은 유효한 것일까요.

여성작가 정해윤(45)의 작품 세계는 이에 대한 고민의 발로입니다. 서울대 동양화과 출신인 그는 동양화 물감과 함께 아교에 푼 금분과 은분을 사용합니다. 전통 한지인 장지도 고집하지요. 그런데 이 물감을 장지에 겹겹이 먹여 유화 같은 두터운 마티에르를 낸 결과물은 마치 서양화의 기하학적 추상화 같습니다.

무엇보다 형상 때문이지요. 금속성의 원통형 기둥, 복잡하게 얽힌 배수관, 사슬처럼 꼬여 있는 유선형 관 등이 여백도 없이 화폭을 가득 채웁니다. 그나마 동양화적인 느낌을 주는 소재가 있다면 돌을 소재로 사용한 그림 정도라고나 할까요. 이마저도 여백을 흰색으로 채웠지요. 여백이 없는 동양화는 있을 수 없는데 말입니다.

이럴 바엔 캔버스가 낫지 않을까요. 지난 28일 만난 작가에게 이런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봤지요. 약간은 흥분한 목소리로 답하더군요.

“동·서양화를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은 재료에 있습니다. 특히 장지는 어느 것도 대체할 수 없는 중후한 매력이 있어요. 장지에 색을 먹이고 먹이는 과정은 마치 (흙 같은 재료를 붙이고 붙이는) 소조를 하는 기분입니다.”

그러면서 “동양화는 먹이 번지는 ‘발묵 효과’의 수묵 담채화이며 여백의 미가 있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깨고 싶었다”고 강조하더군요.

그의 그림은 가까이 가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머리카락보다 가는 선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면입니다. 더욱이 은분과 금분을 사용해 마치 화려한 은사, 금사로 촘촘히 직조한 직물의 느낌마저 줍니다. 거기에 박새가 있고, 실타래가 있습니다. 돌멩이에는 저마다 안은 인생처럼 시침과 초침이 있습니다.

그렇게 삶과 인생을 이야기하는 철학적인 그림이라고나 할까요. 사슬처럼 꼬인 관의 형상을 보고 엉킨 삶의 실타래를 떠올리는 이가 있을 겁니다. 빠져나온 실타래의 가는 선을 전깃줄 삼아 앉아있는 박새의 위태로워 보이는 모양에서는 견고해보이지만 내면은 불안한 인생을 연상하는 이도 있겠지요. 무수한 돌들이 모서리가 마모되어 어깨를 부딪치며 나열되어 있는 그림에선 세파에 닳아가는 삶이 오버랩 되기도 할 겁니다.

화폭 안에 형식상으로는 동양적 색조와 서양의 공간 분석적 사고를 아우르며 주제에서는 삶을 녹여내는 현대적 동양화,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문제는 서양인도 동양인도 누구도 처음엔 그의 그림이 동양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 중간의 경계가 주는 팽팽한 긴장감이 그림의 매력입니다. 올해 3월 유럽 최고 아트페어의 하나인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의 테파프에 출품돼 호평 받았습니다. 그는 동양화의 전통을 잇는 것일까요, 파괴하고 있는 것일까요? 전시장에서 그 답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서울 종로구 평창30길 가나아트센터 ‘플랜 B: 정해윤 개인전’은 5월 23일까지 열립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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