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보다 특종을 좇던 16년차 기자였습니다. 올해 초 3살 딸아이가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고서야 ‘아빠’가 됐습니다. 이후 인영이의 투병 생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소아난치병 환우와 아빠엄마들을 응원합니다.


백혈병을 앓는 아이들은 면역력이 크게 떨어져 있다. 감기만 걸려도 위독할 수 있기 때문에 바이러스가 없는 환경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이식이나 항암치료 또는 바이러스 감염 등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일반병동이 아닌 폐쇄병동인 무균실에 입원해야 한다.

 무균병동에 세 번째 입원해보니 이제 조금 주변이 보인다. 이 곳은 직접 들어와 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을 만큼 특별(?)하다. 우선 돌도 지나지 않은 유아 환자부터 수염이 거뭇거뭇한 10대 후반까지 연령대가 다양하다. 그런데 30명 남짓한 이들 소아 환우는 10년 나이차는 우습다는 듯 쉽게 말을 섞는다.
무균병동의 아고라 광장. 아침저녁으로 모인 아이들은 민주적인 토론을 즐긴다.

 매일 오전 10시 병실 청소시간, 모두들 우루루 아고라 광장 격인 작은 로비에 모인다. 10대 후반의 아이들은 쇼파를 자기보다 어린 소아환우들에게 양보하고 건너편 나무 선반 위에 걸터앉는다. 불량기(?)있는 1진 같이 보이는 10대 형들과 아이들의 대화는 건전하다 못해 웃음이 나온다. 오늘은 한 아이의 엄마가 이름이 붕어빵인 과자를 먹었는데 의료진이 쵸코송이는 되지만 붕어빵은 안 된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며 고민을 하자, 10대 후반 한 친구가 먹고 안 아프면 된다는 명쾌한 답변으로 그 엄마의 근심을 덜어줬다. 한창 자랄 때 먹지 말아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인지, 이들은 모여 ‘김피탕’ 노래를 부른다. 김피탕은 김치, 피자, 탕수육이란다.
한편에서는 6살쯤 돼 보이는 환우가 유모차에 타 있는 어린 환우를 이뻐라 하며 쓰다듬어 주고 있다. 인영이도 어린 축이라 오빠와 언니들의 이쁨을 듬뿍 받고 있다. 주의할 점은 모두 까까머리라 오빠로 보이지만 사실은 언니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인영이를 예뻐하는 한 친구에게 “인영아, 오빠한테 인사해야지”했다가 “저 오빠 아니거든요”라며 한소리를 듣기도 했다.

 저녁 식사 이후에는 대 운동회 시간이 돌아온다. 모두들 링거대를 끌면서 폐쇄병동의 복도를 수십 바퀴씩 돈다. 항암을 받으면 그 독성과 운동부족으로 다리 힘이 약해져 잘못하면 평생 휠체어 신세를 질 수 있기 때문에 운동은 필수다. 복도가 짧고, 좁기 때문에 양방향이 아닌 일방통행의 대부대의 행렬이 연출된다. 여기저기서 힘들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지만 엄마들은 아이들을 힘차게 끌어당긴다.
항암치료를 받는 무균병동 아이들에게 걷기 운동은 필수다. 인영이처럼 잔꾀를 부려 유모차 위에 링거대를 연결(고난이도 기술로 초보자는 쉽게 할 수 없다)해 유람하며 운동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

 이처럼 밝아 보이는 아이들이지만 모두들 힘든 치료를 꿋꿋이 견디고 있는 장한 아이들이다. 어제 웃고 즐기다가도 오늘 갑자기 중환자실로 옮겨질 수 있는 유리병 같은 아이들. 울음소리를 낼 힘도 없어 새벽에 흐느끼는 아이들. 또래 친구들과 학교에서 함께 뛰놀지 못하고 병원과 집만 오가는 아이들. 그래서 오락기와 스마트폰이 유일한 낙이 될 수밖에 없는 아이들.
그리고 적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10년 가까이 이 아이들의 병간호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한 엄마아빠들. 저마다 사연 하나씩을 가슴 속에 간직한 아이들과 보호자들이 한데 숨쉬고 의지하는 곳. 그곳이 바로 소아 무균병동이다.

 소아 무균병동은 환경도 훌륭한 편이다. 인영이가 입원한 성모병원의 소아 무균병동은 특실인 21층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20층에 위치해있어 경치도 좋다. 안에 작은 학교도 있어 학생들은 여기서 수업을 들으면 수업일수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청결한 상태가 유지된다는 점에서 보호자들이 안심할 수 있다.
그러나 무균병동에 입원하기 위해서는 최소 일주일, 많게는 한달 가까이 대기를 해야 한다. 인영이도 대기가 길어져 이번 고용량 항암치료가 일주일 늦춰졌다. 아픈 아이들은 많은데 병상 수는 부족하니 당연한 이치다. 여기에 소아 백혈병을 잘 치료한다고 알아주는 병원들은 모두 서울이다. 세종시는 그나마 가까운 편이고 울산, 광주 등 인영이보다 더 먼 곳에 서는 아이들도 치료를 위해 상경해야 한다.

 총선을 즈음해서부터 생각 있는 복지단체와 전문가들이 모여 어린이 병원입원비 국가 전액 부담 추진 운동을 벌이고 있다. 대규모 흑자 상태인 건강보험 재정의 일부만 써도 아이들이 병원비 걱정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며 아픈 아이들만큼은 국가가 책임져주자는 것이다.
저출산 타개를 위해 수십조원을 쏟아 붇고도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는 정부로선 당연히 검토할 사안이다. 출산 장려논자였던 아내는 인영이가 아프고 국가로부터 어떤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안 뒤에는 주변에 아이를 낳으라는 말을 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직접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아마 정부는 현재 재정상황으로는 시행하기 어렵다는 입장일 것이다.
무균병동 내 도서실 겸 학교. 인영이는 잠자기 싫을 때는 학교가자고 떼를 쓴다. 학교는 24시간 개방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정책적 노력을 통해 양질의 소아 무균병동을 전국적으로 늘리는 일이라도 시작해야 한다. 세종시에 공무원을 모아놓고 국토균형발전을 이야기할 게 아니라 정부가 국내 최고 수준의 소아 무균병동을 세종시에 만들어 놓으면 알아서 서울의 가족들이 이사할 것이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세종이 아니라 부산에서 서울로 매일 출퇴근할 준비가 돼 있는 게 우리 부모들이다. 아이가 아픈 것도 서러운데 내 돈 내고 치료하는데 매번 애타게 줄서서 기다리는 부모들의 심정을 정부가 10분의 1만이라도 이해하고 도우려는 모습을 보고 싶다.(2016년 5월18일)

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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