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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대자보판이 된 강남역 10번 출구

자유, 민주, 약자의 권리 요구…80년대 민주화 운동 연상

강남역 10번 출구는 거대한 대자보판이 되었다. 노란색 분홍색 파란색 흰색의 메모지와 A4용지에는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외침이 가득했다. 댓글과 답글과 하얀 국화와 인형과 초콜렛으로 장식된 대자보였다. “이것이 바로 진짜 강남스타일”이라는 문구도 있었다.
 21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 이른바 강남역 살인사건 장소와 가까운 이 곳에는 피해자를 추모하고 여성의 안전에 무관심한 사회를 질타하는 글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사건이 알려진 직후부터 붙기 시작한 메모지들은 서초구청이 마련한 추모의 벽을 따라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시민들 누구나 쓸 수 있도록 메모지와 필기구, 마스크까지 준비 돼 있었다.



메모지 여러개를 이어 쓴 글도 있었고, 따로 인쇄를 해온 글도 있었지만 대부분 메모지 한장에 짧게 쓴 글들이었다. 내용은 희생자에 대한 추모와 함께, 여성이 경험해온 불안을 토로하는 것이 많았다.

‘난 이제 집에 가. 오늘 바람은 선선하고 새벽 한시가 넘은 이 시간에도 너를 기리는 사람들이 남아 있어. 우리는 오늘이 지나고 해가 뜨면 각자의 집으로 가겠지.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서 숨을 가쁘게 쉬었을 너를 기억해. 아마 내가 있었다면 꼬옥 안아주었을텐데.…”
‘그날 새벽 1시 나도 밖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 나보다 더 취한 친구를 택시 태워 보내면서도 불안해 집에 가면 꼭 연락해라고 했다. 내가 단지 강남이 아닌 다른 곳에서 술을 마셨기에 나는 그날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것이다. 그날도 몇번이나 뒤를 확인하며 집으로 갔다.’

‘저는 당신과 같은 23살 여성입니다. 저는 그날 오랜만에 과제 없이 일찍 잠들었고, 살아남았습니다. 여성이 밤에도 편안히 산책하고 택시를 타고 화장실을 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인형, 초콜렛, 과자와 소줏병도 눈에 띄었다. 하얀 나비 모양의 종이와 파란 띠도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마스크가 등장한 이유는 메모지를 붙이거나 발언하는 이들이 또 다른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외국인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영어, 중국어, 독일어, 불어 등 외국어로 쓴 메모지들도 여럿 있었다.



메모지를 읽어가던 여성들 중에는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라며 눈가를 붉히는 이들도 있었다. 궁금해하는 외국인들에게 설명해주는 모습도 보였다.

남성들을 싸잡아 비난하거나 거칠게 쓴 메모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희생자를 추모하고, 여성들이 느껴온 불안을 토로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행동하겠다는 글들이었다.

그 행동을 남성에게만 맡기지 않고, 남성 위주의 시선으로 진행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하는 내용들도 있었다. “오빠가 지켜줄게”라는 식으로 남성의 선의에 기대게 하는 대처가 아니라 아무도 지켜주지 않아도 여성 스스로 안전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사건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에 참여하는 글들도 많았다. 대체로 불특정다수의 여성을 향한 범죄라는 점에서 여성혐오 범죄라고 규정하고 그런 관점에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80년대 대학가에서나 볼 법했던 익명의 손글씨가 적힌 종이들이 21세기 서울 강남에 등장했다. 마치 인터넷 글처럼 짧고 간단한데다 인터넷에 댓글을 달듯이 메모지와 메모지가 겹쳐 이어지며 활발한 논쟁까지 진행되는 모습이다.

여성이 사회적 약자로서 일상적으로 겪어왔던 불안과 차별을 토로하고, 여성들 스스로 변화를 일으키자는 내용이었다. 

예전의 대자보와 형식이나 장소, 주제는 다를지라도 자유와 민주주의, 약자의 권리를 요구한다는 점은 같았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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