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쓸 재료를 모으는 취재는 사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사람 취재가 없는 숫자와 통계의 나열은 죽은 기사다. 그래서 기자들은 사람들을 자주 많이 만나야 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2000년대 초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기사 작성할 때 언급된 사람들은 이름 옆 괄호 안에 나이와 직업을 써야했다. 기사에 딱 맞는 멘트를 땄어도 그 사람의 나이와 직업을 모르면 써먹지 못했다. 선배들한테 보고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도 “몇 살인데, 뭐 하는 사람인데”가 가장 많았던 것 같다.

며칠 전 한 환우의 아버지를 만났다. 한 달 전 쯤 환우 카페에서 익명으로 한 내 질문에 답글을 친절히 달아준 선배 환우 보호자시다. 나는 정보에 목말랐고, 그 분은 계속되는 내 절박한 질문에 본인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처음 통화할 때 나와 같은 남자라는 점에 반가웠고, 내 답답한 곳을 긁어주는 조언에 감사했다. 그 분은 우리 애보다 4개월 쯤 전에 발병한 아이의 아빠로 자신도 처음엔 그런 혼란과 어려움을 겪었다면서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그 뒤로 그 분께 종종 문자나 전화로 궁금한 것들을 묻곤 했다.

그리고 며칠 전, 인영이가 척수 주사 시술에 실패해 낙심하고 있을 때 외래 치료 차 병원에 왔는데 얼굴이나 보자는 그분 제의에 우리는 번개를 했다.
혼잡한 병원 1층 카페에서 우리는 서로를 感으로 바로 알아챘다. 서로 이름을 모르기에 나는 그분을 ‘선생님’으로 그분은 나를 ‘아버님’으로 칭했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과 직업 대신 아이의 치료 경과를 물었다. ‘선생님’은 휴직을 하고 10살 된 외동딸을 간병하고 있었다. 아내 역시 몸이 좋지 않아 휴직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 역시 회사에서 많은 배려를 해주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 선생님은 선배답게 최근 병원에서 있었던 작은 의료사고와 조심해야 할 초짜 의료진을 귀띔해줬다. 자기 딸아이는 백혈병재단에서 무료로 맞춰주는 가발에 매우 만족해한다며 신청하는 법도 알려줬다. 나는 수련의들이 척수 주사 시술에 익숙해질 때면 또 신참이 와서 아이들이 고통을 받는 현실을 토로했고, 그분은 지난달 고용량 항암을 할 때 너무 힘들다고,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딸애의 하소연에 가슴이 너무 아팠다고 말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아 서둘러 자리를 마무리했다. 그분은 빈손으로 온 나와 달리 딸애 주라며 타요 장난감을 쥐어주었다. 우리는 또 연락하자며 악수를 했고 헤어졌다.

기자스런 만남으로 치자면 나는 그분에 대해 아무 것도 쓸 수 없다.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모른다. 하지만 단 10여분만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나는 그분에 대해 원고지 20매 정도의 한 면용 주말판 기사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오늘 따슨 봄 햇살에 ‘그분들’이 생각났다. 그들이 왜 함께 모여 있고, 함께 걷고, 함께 기도하는 지 어렴풋이 조금 더 알 것 같다. 다시 봄이다. 많은 사람들이 꽃보다 세월호를 먼저 생각하는 봄이 됐으면 좋겠다. 내가 아파보니 아픔은 나누면 조금은 덜 아프기 때문이다.(2016년3월27일)

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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