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 전 대법관이 이명박정부 시절 중앙공무원교육원(원장 윤은기)에서 '청렴이 나와 국가의 경쟁력'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고 있다. 뉴시스

“저희 점심 약속 미뤄야 하지 않을까요?”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실 앞 텅 빈 복도를 걸어가는데 한 비례대표 초선 의원실에서 전화가 왔다. 앞으로 한 달 동안은 점심·저녁 약속을 무조건 안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였다. 

 드디어 9월 28일이었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이 시행되었다. 조심스러운 눈초리가 서늘하게 살갗에 와 닿았다. 야당에서는 내년 대선 정국을 걱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찰과 선거관리위원회 등이 김영란법을 이용해 무죄받을 것을 알면서도 야당 정치인을 법정에 세울지 모른다는 염려였다.

 법의 취지는 명확했지만 법 자체는 희미한 거미줄 같았다. 법은 8조 2항에 “직무와 관련하여 (중략) 금품 등을 받거나 요구 또는 약속해서는 아니 된다”라며 원칙적으로 맹물 한 잔도 건네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8조 3항에는 “원활한 직무수행을 (중략) 목적으로 제공되는 음식물·경조사비·선물 등”은 “수수를 금지하는 금품에 해당하지 아니한다”라고 쓰여있었다. 직무와 관련해 커피 한 잔도 주고받으면 안 되지만 직무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커피 정도는 주고받아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란 볼멘소리가 진작부터 쏟아져 나왔다.


 불안한 노릇이었다. 한 더민주 당직자는 중앙선관위에 전화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알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새누리당은 여당 출신 박근혜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 정의화 국회의장이 기념품으로 선물해왔던 시계를 더민주 출신 정세균 국회의장이 만들자 부패혐의자로 몰아가며 이중잣대를 구사하고 있었다. 지인의 돌잔치에 갔다가 정부·여당에 의해 대선정국에서 비리 정치인으로 낙인찍힐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그런 모든 염려에도 불구하고 법 자체는 끝까지 밀어붙여야 한다는 의견이 중론이었다.

국민의당 박주현 의원. 제공 의원실 블로그

“영란 언니가 진짜 제 역할했네요”

 점심시간, 국회 구내식당에서 동료 기자와 식권을 사고 있는데 국민의당 박주현 의원을 마주쳤다. 총선 이후 오랜만이었다. 박 의원과 보좌관 선배, 인턴 직원, 그리고 나와 동료 기자는 각각 식판 하나씩 앞에 두고 자리에 함께 앉았다. 

 오늘 메뉴는 제육볶음과 된장찌개 그리고 계란말이와 감자채 볶음이었다. “우리 각자 계산했으니까 같이 앉아도 되는 거 맞죠?” 서로서로 준법의지를 다지며 가볍게 웃었다. “요즘 뭘 해도 ‘이게 김영란법 위반인가?’ ‘부정청탁인가?’ 생각하고 말하고 그러잖아요. 그것 자체가 진짜 커다란 진전 같아요” 박 의원이 생글생글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김영란법 시행 첫 날. 의원회관 구내식당 메뉴. 박주현 의원은 왼쪽, 나와 동료기자는 오른쪽 메뉴를 먹었다. 고승혁 기자

 “영란 언니가 진짜 제 역할했네요. 지금 이렇게 세상이 더 좋아지게 한 거잖아요” 박 의원은 김영란 전 대법관의 서울대 법대 6년 후배로 언니·동생 하는 사이였다.“영란 언니는 대법관 끝내고 전관예우 안 받겠다고 변호사 개업도 안 했잖아요. 대단한 사람이에요” 왁자지껄한 구내식당에서 박 의원은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김 전 대법관과 얽힌 소소한 일화를 말해주었다.

 하지만 걱정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직무연관성 부분이 애매해 처벌 기준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유럽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온 박 의원은 핀란드 사례를 인용하며 중요한 정책이나 법률 시행 전 시험기간을 둬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실제 사례를 법에 대입해서 정확히 무엇을 금지할지 명확히 하지 않으면 법률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걱정이었다. 구내식당에서 김영란법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마침 옆 테이블에 더민주 박홍근 의원이 식판 앞에 앉으며 인사했다. 반대편에는 더민주 손혜원 의원실 보좌진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여의도 식당가 “손님 없어요”

 오후 7시쯤 김영란법 관련 취재차 여의도 식당가를 돌아다녔다. 큰 식당일수록 타격이 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전 자주 들렀다고 알려진 중식당에는 손님이 단 두 팀 있었다. 점심시간에는 늘 예약이 꽉 찼던 8개 작은방이 다 비었다고 했다. 

 한 일식당 매니저는 “우리 아들이 스터디룸 빌리는 것만 해도 2시간에 1만 원 안팎이다. 여의도에서 조용히 대화하라고 방 주고 밥도 주면서 3만 원 이하 받으면 망하라는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정치인이 자주 찾는 보리굴비 전문점에는 세 팀이 식사 중이었다. 사장님은 하루 동안 예약률이 20%가량 떨어져 손실이 200~300만 원에 달한다고 했다. 그는 음식값을 10년 전 수준으로 내렸는데 임대료는 10년 전 2배라고 지적했다. 사장님은 “부패니 청탁이니 누가 도둑질을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왜 식당 주인이 피해를 떠안아야 하느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몇몇 식당 주인들은 곧 정상화될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지금은 시행 초기라 정치인과 관료·기자들이 더치페이로 만나는 것조차 조심스럽게 생각해 약속을 다 취소했지만 언제까지 안 만날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삐걱거리면서도 조금씩 깨끗한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정부 세종청사 유리창을 청소업체 관계자가 깨끗이 닦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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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혁 기자 marquez@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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