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90>시대극 유감 기사의 사진
두 편의 영화를 같은 날 봤다. ‘이집트의 신들(Gods of Egypt, 2016)’과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1971)’. 둘 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게 아니라는 의미에서 시대극이다. 그러나 두 영화를 같은 카테고리에 넣을 수는 없다. 성격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전자가 이집트 고대신화를 영화로 옮긴 것인데 비해 후자는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왕조의 최후를 그린 정통사극이다. 그러나 전자를 먼저 보고나서 답답해진 마음이 마침 그날 밤 TV에서 방영해주는 후자를 보고 얼마나 평온해졌던지.

왜 마음이 답답하고 평온해졌을까. 기본적으로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신화를 영화화한 것이라지만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이 만든 ‘이집트의 신들’은 마치 슈퍼히어로 영화 같았다. 시대배경만 고대로 한. 암흑의 신 세트가 형인 광명의 신 오시리스를 살해(신인데도 죽는다)하고 권좌를 찬탈하자 오시리스의 아들 호루스가 인간의 도움을 얻어 세트에게 복수한다는 신화가 주내용인데 세트고 호루스고 전지전능한 신이라기보다는 딱 요즘 쏟아져 나오는 X맨 같은, 날개 달린 돌연변이 슈퍼히어로의 모습이다. 하긴 이 영화뿐이 아니다. 그리스신화를 바탕으로 한 ‘타이탄(Clash of the Titans, 2010)’과 ‘타이탄의 분노(Wrath of the Titans, 2012)’의 주인공인 반신(半神) 페르세우스는 물론 제우스와 아폴로 등 올림포스의 신들 역시 이리 저리 날고 뛰는 게 슈퍼히어로처럼 보이긴 마찬가지다. 게다가 얼마 전에 개봉한 ‘타잔의 전설(데이빗 예이츠, 2016)’에 나온 타잔은 어땠나. 트레이드마크인 가죽 가리개 대신 쫄쫄이 같은 바지를 입은 모습이 그대로 헐크요, 넝쿨줄기를 타고 휙휙 날아다니는 모습은 영락없는 ‘스파이더맨’이었다.

도대체 넓은 의미에서 사극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들이 이렇게 슈퍼히어로 영화의 복사판 같아서야 하고 답답한 마음이 안 들 수가 없었다. 그러다 프랭클린 J 샤프너가 연출한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를 보면서 다소 안정됐다. 그만큼 이 영화가 역사적 사실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전통적인 사극이라는 장르에 대단히 충실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반지의 제왕’ 시리즈라든가 ‘무슨무슨 맨’ 시리즈처럼 판타지나 만화에서 유래된 슈퍼히어로영화들이 크게 흥행에 성공한 탓이겠으나 이처럼 시대극(사극) 영화들이 대부분 판타지 아니면 슈퍼히어로 영화의 복사판처럼 된 데 대해 한숨 짓다보니 역사적 사실을 다뤘든 픽션이든 현실적이었던 옛날 사극영화들이 그리워졌다.

우선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파라오의 나라(The Land of Pharaohs, 1955)’가 생각났다. 1949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윌리엄 포크너가 공동각본가로 참여하고 하워드 호크스 연출에 잭 호킨스, 조운 콜린스가 주연한 이 쿠푸왕 이야기는 엄청난 인력을 동원(엑스트라 1만명)해 고대 이집트의 스펙터클한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또 브래드 피트가 아킬레스로 나와 마치 슈퍼히어로처럼, 사람 같지 않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트로이(2004)’의 오리지널 격인 ‘트로이의 헬렌(1956)’도 떠올랐다. 명장 로버트 와이즈가 연출하고 이탈리아 미녀배우 롯사나 포데스타가 헬렌으로 나왔던 영화. 원작인 ‘일리아드’가 대단히 신화적인 내용이었음에도 신화적인 요소는 배제한 채 ‘트로이전쟁’이라는 역사에 사실적으로 접근해 마치 셰익스피어의 사극을 보는 것 같았다.

테르모필레전투라는 실제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면서도 원작이 만화였던, 그래서 진짜 만화 같았던 ‘300(잭 스나이더, 2006)’에 비해 같은 이야기를 리얼하게 묘사한 ‘300명의 스파르타인(300 Spartans, 루돌프 마테, 1962)’은 어떤가. ‘300’에 나온 식스팩 복근 투성이의 레오니다스왕을 비롯한 스파르타 전사들과 도저히 현실의 인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모습으로 그로테스크하게 분장한 크세르크세스대제를 보면서 역사적 사실 따위는 개나 줘버려 라는 심정이었던 데 비해 리처드 이건이 고뇌하는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로, 롤프 리처드슨경이 아테네의 대정치가 데미스토클레스로 나왔던 62년판은 역사와 인간의 땀, 피 냄새가 진하게 풍기지 않았던가.

러셀 크로우를 빅스타로 만든 ‘글래디에이터(리들리 스콧, 2000)’는 어떤가. 비교적 현실적인 사극인 것 같지만 비슷한 주제와 내용, 소재를 다룬 옛날 사극영화들에 비하면 고스란히 판타지영화다. ‘반지의 제왕’이나 크게 다를 바 없는. 고대 로마의 검투사 얘기를 다룬 ‘데미트리어스(Demetrius and the Gladiators, 델머 데이브스, 1954)’의 빅터 마추어는 마치 어벤저스의 멤버 같은 러셀 크로우에 비해 사람 냄새가 물씬 난다. 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후사를 놓고 주인공이 그의 아들 코모두스로부터 날카로운 견제를 받는다는 설정이 똑같은 ‘로마제국의 멸망(앤소니 만, 1964)’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고대 배경의 영화만 그런 게 아니다. 중세 잉글랜드의 전설적인 왕 아더의 얘기를 그린 앙트완 푸쿠아 감독의 ‘킹 아더(2004)’.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들을 그 옛날 브리타니아(잉글랜드)를 정복했던 로마군인으로 설정한 것은 상상력 발휘 차원에서 그럴 수 있다 쳐도 원탁의 기사들이 현란한 경극식 중국 무술을 구사한다는 것은 판타지다. 일말의 현실성도 없다. ‘사극의 왕자’ 찰턴 헤스턴이 출연한 영화들, ‘대장군(The Warlord, 프랭클린 J 샤프너, 1964)’ ‘엘 시드(앤소니 만, 1961)’와 비교해보자. ‘대장군’은 일반적인 생각보다 훨씬 열악했던 중세 봉건사회의 실상을 극히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코스튬 플레이’라고 불리던 종래 할리우드 중세사극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또 스페인으로부터 이슬람세력을 몰아낸 스페인의 장군 로드리고 이야기인 ‘엘 시드’는 뛰어난 무용과 충성심, 고귀한 인품을 두루 갖춰 적인 회교도들로부터도 ‘엘 시드(El Cid=The Lord)’로 불린 인물의 행적과 전투장면을 사실적으로 충실히 그려냈다.

또 중세유럽 하면 생각나는 ‘삼총사(Three Musketeers)’. 알렉상드르 뒤마가 쓴 이 고전 걸작소설은 수차례 영화화됐지만 옛날 것과 요즘 것이 극명하게 다르다. 이를테면 조지 시드니가 감독하고 진 켈리가 주연한 1948년판의 경우 펜싱 검술싸움 장면이 대단히 현실적이면서도 훌륭하게 묘사돼 검술영화로서는 하나의 전형을 만들었다는 평을 받았다. 반면 가장 최근판이라 할 수 있는 폴 W S 앤더슨 감독의 2011년판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설계했다는 비행선이 하늘을 떠다니며 포화를 퍼붓는다. 이게 판타지가 아니고 무엇이랴.

컴퓨터 그래픽 등 영화제작기술의 놀라운 발달에 따라 과거에는 만들기 어려웠던 장면들이 스크린에 담겨지는 것은 반길 일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시대극이 내용에 관계없이 판타지나 슈퍼히어로영화의 아류처럼 만들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컴퓨터 그래픽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어 요즘 기준으로는 다소 촌스러워보일지 몰라도 ‘스파르타쿠스(스탠리 큐브릭,1960)’ ‘4계절의 사나이(A Man for All Seasons, 프레드 진네만, 1966)’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 킹 비더, 1956)’ ‘더 듀얼리스트(The Duellists, 리들리 스콧, 1977)’ ‘아라비아의 로렌스(데이비드 린, 1962)’ ‘북경의 55일(니콜라스 레이, 1963)’ 같은 진지하면서도 재미있는 현실적, 사실적인 사극과 시대극이 보고 싶다.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