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소위 잘나가는 이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검·경 연예인 스포츠 스타를 소개하는 기사는 많지만 평범한 이웃들의 삶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들도 다 사연이 있고, 소중한 이야기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상수동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남자① 인도네시아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남자는 휴가를 맞아 한국에 들렀습니다. 책방 아주머니의 소개로 여자를 만납니다. 책을 좋아하는 여성이었습니다. 한 달 만에 결혼을 약속합니다. 둘 사이에 태어난 남자아이는 인도네시아에서 자랐습니다. 아이는 유모차에 몸을 실은 채 사람을 만날 때마다 선거철 국회의원처럼 손을 흔들었답니다. 이 아이가 남자①입니다.

남자②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호주로 대학을 갔습니다. 본인은 도피성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지인에게 전해 듣기론 우수한 성적으로 4년을 보냈답니다. 회계학을 전공했습니다.
 호주에 있을 때 현지 인도네시아 음식점을 자주 갔습니다. 거기가 한국식당보다 가격이 저렴했답니다. 이 사람이 남자②. 소설가 장강명이 쓴 책 ‘한국이 싫어서’를 보면 ‘계나’라는 여성이 등장하는데, 그녀도 호주에서 회계학을 공부했습니다.

남자① 어머니는 아이가 한국말을 어눌하게 하진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책을 잔뜩 뒀습니다. 50권짜리 ‘디즈니 그림 명작 전집’과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를 읽은 기억이 난다고 했습니다.
 일곱인가 여덟 살 때 축농증 수술을 받으러 반년 정도 한국에 머무릅니다. 당시 한국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첫 받아쓰기 시험에서 빵점을 맞았습니다. 그때부터 한글공부를 엄청 했고, 인도네시아로 돌아가기 직전에 100점을 받습니다.
 ‘한국이 싫어서’엔 계나가 디즈니 그림 명작 전집 중 ‘추위를 싫어한 펭귄’을 종이가 닳을 때까지 읽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펭귄은 따뜻한 열대지방에 가려고 엄청 애쓰는데, 수차례 실패 끝에 결국 하와이처럼 생긴 섬에 도착합니다. 그러고보니 이 남자 약간 펭귄을 닮은 것 같기도 합니다.

남자② 시드니 도심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엔 베트남 난민촌이 있습니다. 남자는 굳이 쌀국수를 먹겠다고 그곳에 갔다가 갱을 만납니다. 경찰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긴 했지만 자칫했다간 위태로운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남자는 영혼이 자유로웠습니다. 무작정 떠나는 여행을 즐긴답니다. 당일 항공권을 끊고 비행기의 굉음을 듣기도 했고, 아무 지하철역에 내려서 론리플래닛엔 없는 길을 걷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떠난 여행이 스무번 가까이 된다고 했습니다.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이 강한 남자입니다.

남자① 인도네시아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그가 한국에 정착한 건 대학생이 되면서부터입니다. 서강대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그는 KBS 조선일보 한겨레 경향신문에서 차례로 인턴생활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게 좋았답니다. 그러다 딜레마에 빠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지하철에서 불법복제 CD를 판매하는 사람들을 취재하며 겪은 일입니다.
 남자는 그 세계의 속사정을 알기 위해 돈 없는 대학생이라고 하고 접근했습니다. 판매상 아저씨들은 남자를 위로하며 일을 가르쳐줬습니다. 따뜻한 커피를 건네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해 준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사를 통해 불법복제 CD의 실태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아저씨들은 쫓겨났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4년 정도 기자생활을 하다 2012년 12월 그만둡니다. 계나의 전 남자친구도 방송기자입니다. 항상 밤늦게 퇴근하지만 사회부 기자라는 자부심에 차 있는 남자로 묘사돼 있습니다.

남자② 영혼이 자유로웠던 그는 직장생활을 하며 따박따박 월급받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와 사업을 시작합니다. 중국에서 약재를 들여와 팔았습니다. 해외에서 의류를 수입해 유통하는 일도 했고, 태닝 사업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나름 벌이도 괜찮았답니다.
 크게 엎어져 본 경험도 있습니다. 온라인 의류 사업에 손을 댔는데 그게 잘 안됐나봅니다. “에이, 젊었을 땐 한번쯤 엎어져도 되죠, 뭐.” 당찬 목소리로 이런 말을 내뱉었습니다. 얼마 뒤 남자①을 만납니다.

남자① 음식 만드는 걸 좋아했습니다. 군대 휴가 때 요리책을 사들고 복귀해 취사장에서 몰래 요리를 하곤 했습니다. 기자를 그만둔 뒤 밀어내기 파동으로 유명해진 유통회사와 IT회사 등에 잠시 다녔지만 결국 음식점을 차려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얼마 뒤 남자②를 만납니다.

남자① 최아름(오른쪽)씨와 남자② 배현규씨

남자① 최아름씨와 남자② 배현규씨는 서른 셋 동갑내기입니다. 둘은 인도네시아 음식점을 차리기로 하고 함께 인도네시아에 갑니다. 아름씨는 물리아호텔의 인도네시아 셰프를 찾아가 요리를 배웠고, 현규씨는 평소 여행하던대로 골목 구석구석을 돌며 음식점을 살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지난 2월 상수역 3번 출구 인근에 ‘빈땅’을 차립니다. 빈땅은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되는 맥주 이름인데, ‘운명’이란 뜻도 있다고 합니다.

해질 무렵 빈땅의 전경

둘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인생은 운명대로 정해져 있다기보다 익스트림 스포츠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이 싫어서’에 나오는 계나는 호주에서 한차례 큰 위기를 겪은 뒤 이렇게 말합니다. “익스트림 스포츠 같은 거 안 해도 내 처지가 원래부터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신세였는데, 그걸 몰랐네.”

 벼랑 끝에 매달린 신세. 왠지 대한민국의 553만4000명(지난 8월 기준)의 자영업자를 표현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안좋네요. 그나저나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지하철에서 CD를 팔던 아저씨들은 지금 뭘 하면서 살고 있을지 말이죠. 벼랑 끝에서 조금이라도 안쪽으로 들어오셨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빈땅에서 요리를 하는 아름씨.

영혼이 몹시 자유로운 현규씨 모습.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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