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소위 잘나가는 이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검·경 연예인 스포츠 스타를 소개하는 기사는 많지만 평범한 이웃들의 삶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들도 다 사연이 있고, 소중한 이야기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상수동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상수역 3번출구 앞에 있는 펍 '신기술'에서 사무엘 빈보가 음식을 만들고 있다.

사무엘 빈보(34)는 미셸 푸코와 알베르 카뮈의 나라 프랑스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를 한국으로 이끈 건 사진작가 최민식(1928~2013)과 건축가 조민석입니다.
 이들의 예술성에 반해 한국 땅을 밟은 사무엘은 첫날부터 술에 취해 공원 벤치에서 잠이 듭니다. 한국에 오면 재워주기로 했던 한국인이 있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두절된 겁니다. 이런 망할. 포장마차에 들어가 처음 마셔보는 소주를 몇 병 들이킨 뒤 공원 벤치에 곯아떨어졌습니다. 2009년 11월, 어느 파리지앵의 한국생활은 이렇게 낭만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사진작가 최민식(1928~2013)씨.

프랑스에서 예술사를 공부한 그가 한국에서 처음한 건 농사일입니다. ‘우프(WWOOF)’를 통해 경기도 양평의 한 농가에 들어갔습니다. 우프는 여행객이 농가의 농사일을 도와주고 숙식을 제공받는 프로그램입니다.
 여기서 단호박 농사를 짓다가 경북 문경으로 갑니다. 귀농을 준비하던 지인을 도와 재래식 변기를 사용하는 허름한 집에서 6개월을 머뭅니다. 그 다음으로 한 게 나무를 깎고 다듬는 목공일. 펜션에 머무르면서 주인에게 1년가량 목공일을 배웁니다.

“잠깐만”

잠시 말을 멈추더니 자신의 무릎 위에 있던 벌레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손등에 벌레를 태우더니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습니다.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벌레는 느긋하게 제 갈 길을 갑니다. 그리곤 사무엘이 다시 입을 엽니다. “놀고 싶어서 서울로 왔어요. 홍대로.”

사무엘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 경북 문경에서 귀농을 준비하는 지인을 도우며 살 때다.

사무엘은 지방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옵니다. 하루는 덕수궁 앞에서 가판을 펼치고 프랑스 엽서를 파는데 한 남자가 다가왔습니다. 50대쯤 돼 보이는 중년 남성이었는데 말을 섞어보니 대화가 너무 잘 통하더랍니다. 장사를 접고 홍대에서 펑크(punk) 공연을 같이 본 뒤, 상수역 4번 출구 앞에 있는 바(bar) ‘상수리’에서 다른 일행들과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한창 이야기를 하는데 남자가 사라졌습니다. 잠시 뒤 피아노 연주가 시작됩니다. 상수리 직원은 급히 배경음악을 껐고, 안에 있던 손님들은 숨죽여 중년의 남자가 연주하는 쇼팽의 곡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연주가 끝난 뒤 10초간의 정적. 그리고 쏟아지는 박수 소리. 사무엘은 당시를 회상하며 “아주 잠시 동안 헤븐(heaven·천국)을 경험했다”고 했습니다.
 좋은 연주를 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러 온 상수리 주인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40년 전 학창시절 기숙사 룸메이트를 여기서 만난 겁니다. 주인은 그날 가게에 있던 비싼 와인을 몽땅 꺼냈습니다. 삶은 그 자체로 한편의 영화입니다.

바 상수리.

지난해 6월 사무엘은 지인들과 함께 독립영화를 찍었습니다.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해 갈팡대는 이들을 돕는 뱃사공의 이야기입니다. 인생은 기나긴 수행의 연속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답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은 수행의 연속일 수도 있고, 요행의 연속일 수도 있어.”

뭔가를 갈고닦는 걸 수행이라고 한다면, 사무엘은 농사와 목공일을 거쳐 지금은 요리를 갈고닦고 있습니다. 잠시나마 천국을 경험했던 상수동에서 말이죠.

'신기술'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사무엘.

사무엘은 프랑스에 있을 때 밖에서 사먹는 음식이 너무 비싸서 요리를 직접 해먹었답니다. 자기 집에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연 적도 많습니다.
 요즘엔 ‘신기술’이라는 펍(pub)에서 요리를 하는데 메뉴 중엔 당시 파티 때 만들었던 음식도 있습니다. 사무엘이 문득 프랑스 독립 영화의 대사 같은 말을 던집니다.

 “농사를 짓는 것도 예술이고, 목수를 하면서 집을 만드는 것도 예술이고, 음식을 만드는 것도 예술이야. 인생이 수행의 연속인 것처럼 예술도 갈고 닦아야 해. 쉽진 않겠지만 인생이든 예술이든 한계를 그어놓을 필요는 없어.”

'신기술' 외부 모습. 안에 손님들이 가득 들어차 있지만 조용한 분위기를 연출할 때도 많다.

평범한 사람들이 삶을 살아내는 것 자체가 예술입니다. 사무엘을 처음 한국으로 이끌었던 사진작가 최민식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담긴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생전에 발표한 14권의 사진집 이름도 ‘인간’입니다. 최민식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작품에는 삶과 예술이 어우러져 있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더 보기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