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93>저예산 대박영화 기사의 사진


2016년작 ‘맨 인 더 다크’를 봤다. 원제는 ‘숨도 쉬지 마(Don't Breathe)'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당초 영화의 가제(假題)였던 ’어둠 속의 사나이(Man in the Dark)‘를 제목으로 사용했다. 샘 레이미의 출세작이자 컬트 클래식으로 자리잡은 공포영화 ‘이블 데드(1981)’의 리메이크작(2013)을 감독한 우루과이 출신의 피드 알바레즈가 연출한 영화는 그저 그랬다. 3명의 불량 젊은이가 눈 멀고 나이 든 이라크전 참전용사의 집에 돈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오히려 맹인 노인네에게 당해 2명이 죽고 한명만 간신히 살아남아 도망친다는 내용. 어둠 속의 집 안에서 벌어지는 쫓고 쫓기는 장면들이 스릴감을 자아내기는 하지만 그게 다다. 상상을 초월하는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새롭거나 특별할 게 아무것도 없다. 또 아주 무서운 것도 아니고 놀라운 반전(反轉)도 없다. 게다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2층 주택이 내부는 뭐가 그리 넓고 복잡한지 마치 놀이공원 같은 느낌마저 준다. 그만큼 현실감이 떨어진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대박을 쳤다. 990만달러의 제작비로 1억4700만달러를 벌어들인 것. 과연 이 영화가 그토록 많은 관객을 끌어들일 만한 것인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판단이 다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이해불가다. 하긴 요 몇 년 새 몇편씩이나 나온 ‘1천만 관객’ 국산영화들도 그럴만 하다기보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았는지 납득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으니 내 영화 감식안이 무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영화를 보면서 저예산으로 대박을 터뜨린 또 다른 영화들이 떠올랐다. 먼저 옛날 것으로 ‘이지 라이더(Easy Rider, 데니스 호퍼, 1969)’가 생각났다. 마약과 히피로 요약되는 ‘반문화(反文化)’의 대표작이었던 만큼 우리나라에서는 결국 극장에서 상영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걸작 클래식은 전세계적으로 6000만달러(미국내 4100만달러)의 수입을 올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와 ’졸업‘에 이어 미국에서 1969년도 흥행수입 3위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제작비는 36만달러에 지나지 않음으로써 대형 영화사들이 저예산으로도 돈 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이밖에 오늘날 고전이라 불릴 수 있는 것들 중에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과 ‘록키1976)’ 그리고 ‘매드 맥스(1979)‘도 떠올랐다. 아울러 ‘용쟁호투(1973)’와 ‘목구멍 깊숙이(Deep Throat, 1972)'도.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은 오늘날 붐을 이루고 있는 좀비영화의 효시다. 11만4천달러의 제작비로 42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찰턴 헤스턴 주연의 ‘오메가맨(1971)’ 윌 스미스 주연의 ‘나는 전설이다(2007)’의 오리지널이라고 할 수 있는 빈센트 프라이스 주연 ‘지구 최후의 사나이(Last Man on Earth, 1964)’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이 영화는 단순한 괴기공포물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를 풍자하는 영화로 컬트 클래식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런데 ‘지구 최후의 사나이’ 역시 저예산영화로서 좀비영화의 실질적 효시라는 점에서 컬트 클래식으로 꼽힌다. 즉 이 영화에는 리처드 매티슨의 원작소설에 따르면 날쌔고 민첩한 뱀파이어여야 할 괴물들이 어기적거리는 그로테스크한 모습-마치 요새 좀비와 흡사한-으로 등장한다. 워낙 저예산이라 제작비가 모자랐던 탓이다. 그런데 그 희한한 괴물이 로메로에 의해 좀비로 ‘재탄생’한 것이다.

실베스터 스탤론을 무명에서 일약 스타로 만든 ‘록키’는 어떤가. 100만달러가 채 못되는 99만5천달러의 제작비로 2억2500만달러를 건졌다. 또 역시 별 볼일 없는 호주영화에나 출연하던 멜 깁슨이라는 무명배우를 출세시킨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의 대표작 ‘매드 맥스’-아이러니하게도 이 역시 호주영화였다-는 30만달러를 들여 99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리고 불세출의 쿵푸스타 이소룡의 유작이 된 ‘용쟁호투’는 85만달러로 9000만달러의 수입을 올렸고 본격적인 포르노 시대의 개막을 알린 ‘목구멍 깊숙이’도 겨우 2만달러의 예산으로 최소 1억, 최대 6억달러(계산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라는 엄청난 수입을 기록했다.

이런 저예산 대박영화를 장르별로 보면 호러, 스릴러물이 가장 많다. 호러영화 관객들은 값비싼 스타들을 보는 것보다 영화가 관객들에게 어떤 강렬한 느낌을 주느냐, 즉 관객들의 어떤 반응을 이끌어내느냐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고, 스릴러영화도 어떤 배우를 캐스팅하느냐보다 오로지 내러티브에만 관심을 쏟으면 되기 때문에 그만큼 저예산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장르의 고전급으로 ‘왼편 마지막 집(The Last House on the Left, 1972)'이 있다. 웨스 크레이븐이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오스카상 수상작(최우수 외국어영화상) ‘처녀의 샘(1960)’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이 폭력이 난무하는 호러영화는 8만7000달러의 제작비로 31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또 컬트영화의 대부격인 데이빗 린치가 만든 기묘한 호러영화 ’이레이저헤드(Eraserhead, 1977)’도 있다. 린치의 장편 데뷔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주인공의 꿈과 환상을 흑백으로 그린 초현실주의 호러물로서 제작비 2만달러로 700만달러의 흥행수입을 올렸다. 그런가 하면 호러영화 팬들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핼로윈(1978)’도 있다. B급 영화의 거장 존 카펜터가 만든 이 영화는 32만5000달러의 제작비로 7000만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왼편 마지막 집‘을 제작했던 숀 커닝햄이 직접 연출자로 나서 만든 ‘13일의 금요일’은 아이스하키 마스크를 쓴 희대의 살인자 제이슨을 선보이면서 제작비 50만달러를 수입 5900만달러로 뻥튀기하는 저력을 보였다.

호러영화의 이러한 선전(善戰)은 근년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마치 장난같이 시작한 영화가 뒤로 가면서 참혹한 호러로 연결되는, 싸구려 티가 역력한 ‘쏘(Saw, 2004)'는 120만달러로 1억300만달러를 벌어들이면서 다수의 속편을 생산해냈다. 그리고 모큐(가짜 다큐멘터리) 열풍을 불러일으킨 ’블레어 위치(The Blair Witch Project, 1999)'와 ‘파라노말 액티비티(Paranorml Activity, 2009)'. ‘블레어 위치’는 핸드헬드 카메라를 이용해 다큐멘터리 기법을 원용한 호러영화로 많은 관객들에게 진짜다, 아니다 하는 논란을 야기할 정도였는데 6만달러의 제작비로 2억48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또 초자연적 공포영화인 ‘파라노말 액티비티’는 감독 자신의 집에서 고작 7일 동안 촬영해 만들었다. 이 영화는 1만5000달러를 들여 1억9천300만달러의 수입을 올림으로써 투자 대비 최고의 수익을 기록한 영화가 됐다.

가장 최근에는 역시 초자연적 공포를 다룬 ’컨저링(2013)'이 저예산이라기엔 좀 많은 2000만달러를 투입해 3억1천800만달러의 수입을 올렸고, 하룻동안 살인 등 폭력이 허용되는 디스토피아적 근미래 사회를 암울하게 그린 ‘퍼지(The Purge, 2013)'는 300만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8900만달러의 수입을 기록했다.

물론 호러 장르에만 저예산 대박영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 로맨스, 코미디 등에도 저예산 대박영화들은 있다. 옛날 것으로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로 유명해지기 전에 만든 ‘아메리칸 그래피티(1973)’가 있다. 이 청춘 코미디는 77만7000달러의 제작비로 1억4000만달러의 흥행수입을 올렸다. 하긴 ‘스타워즈’도 저예산 대박이긴 마찬가지였다. 보통 제작비가 많이 들기 마련인 SF치고는 상당히 적은 1100만달러로 4억6000만달러를 벌었으니.

거리에 내몰린 실직 노동자들이 남성 스트립댄서로 나선다는 웃픈 이야기인 영국 영화 ‘풀 몬티(1997)’. 제작비 350만달러로 2억5700만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또한 영국감독 가이 리치를 스타덤에 올려놓으면서 가수 마돈나에게 장가까지 가게 해준 범죄코미디 ‘록 스탁 앤드 투 스모킹 배럴스(L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 1998)'도 있다. 제작비 135만달러에 수입 2800만달러. 이보다 앞서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젊은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를 세상에 알린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Sex, Lies, and Videotape, 1989)'가 120만달러의 제작비로 2470만달러의 수입을 거뒀다.

2000년대 들어서도 저예산 대박영화는 줄을 이었다. 2003년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 베테랑 빌 머레이와 신성(新星) 스칼렛 조핸슨이 멋진 호흡을 보여준 이 영화는 400만달러의 제작비로 1억2000만달러를 벌었다. 또 2007년의 ’주노(Juno)'. 혼전임신을 다룬 이 청춘 코미디도 750만달러의 제작비로 2억3100만달러의 흥행수입을 기록했다.

이에 비하면 좀 많다 싶은 예산을 투입했지만 그래도 투자 대비 고수익을 창출한 영화들도 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2008)’와 ‘킹스 스피치(2010)’. 유쾌한 인생 코미디인 이 두 영화는 1500만달러씩 투자해 각각 3억7700만달러, 4억14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이런 저예산 대박영화들을 보노라면 꼭 돈이 돈을 버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김상온 (프리랜서 영화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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