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95>리더십에 관한 고찰 기사의 사진
헌정 사상 이런 일은 없었다. 국민 1만명 중 500명만 지지하는 대통령이라니. 이래서야 어떻게 대통령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당초 박근혜 대통령이 선출됐을 때 많은 국민은(그를 찍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해) 그가 영국의 마거릿 대처나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처럼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해 국민의 전폭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는 여성 최고지도자가 돼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최순실 사태’가 터진 지금 그는 또 한 명의 메가와티로 전락해버렸다.

메가와티가 누군가. 인도네시아의 독재자 수카르노의 맏딸로 정계에 뛰어들어 수카르노의 뒤를 이은 또 하나의 독재자 수하르토에 대항함으로써 야당의 대표선수 격으로 국민의 환영을 받은 끝에 와히드 대통령 정부에서 부통령에 올랐다가 와히드가 탄핵을 받아 쫓겨난 뒤 대통령직을 물려받았으나 전임자의 잔여임기만 채운 채 사라진 여성 정치인이다. 그가 직선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것은 대통령 재임 중 보여준 결단력 결여, 특히 중요한 정책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데다 뚜렷한 국정방향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의 딸이라는 성장배경에서부터 정치가나 행정가로서 내세울만한 경륜과 경력이 없었음에도 정계 거물로 성장해 대통령의 자리까지 차지한 과정이 박 대통령과 대단히 흡사해 혹시라도 박 대통령이 메가와티의 전철을 밟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없지 않았는데 그 우려가 현실이 됐다.

어쨌든 우리에게 닥친 국가 지도력의 위기, 나아가 실종 국면에서 훌륭한 지도력, 진정한 지도력이란 어떤 것인지 리더십에 관한 교훈과 통찰을 주는 영화들을 몇 개 뽑아본다.

①정오의 출격(12 O’clock High, 1949)= 전쟁영화지만 리더십 교본으로 현재까지 군과 기업, 학교 등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2차대전 중 과도한 임무수행에 내몰려 지치고 지리멸렬해진 미군 폭격기 부대에 새로 부임한 지휘관(그레고리 펙)이 부대를 새롭게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혹독한 처사로 처음엔 부대원들의 원성을 들었으나 비전과 목적의식을 분명히 인식시킴으로써 부대원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게 돼 군기 충만한 부대를 만든다는 이야기.

②케인호의 반란(Caine Mutiny, 1954)= 2차대전을 배경으로 독선적이고 정신적으로 불안한 군함 함장(험프리 보가트) 휘하에서 근무하던 장교들이 위기상황이 닥치자 함장에 대한 불신을 그대로 드러내 함장을 구금하는 등 ‘선상반란’을 일으켜 군사재판을 받는다는 줄거리. 지휘관이란 무엇인지, 특히 배처럼 특수한 환경에서 전폭적인 권한을 위임받은 지도자는 부하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신뢰를 잃지 않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③지상최대의 작전(The Longest Day, 1962)= 2차대전의 전환점이 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다룬 영화. 작전의 가장 큰 공은 물론 해변에서 목숨 바쳐 싸운 수많은 병사들의 몫이지만 어마어마한 양의 함정과 항공기, 차량 등 물자와 병력을 빈틈없이 조직하고 동원해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연합군 최고지휘부의 노력 역시 그에 못지않다. ‘거대한 지도력’이란 이런 것임을 보여준다.

④대탈주(The Great Escape, 1963)= 2차대전 중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연합군 장병들을 지휘해 대규모 탈출을 감행토록 하는 영국군 장교 ‘빅 X’(리처드 어텐보로)의 리더십이 빛을 발하는 영화. 혁신과 치밀한 조직력, 그리고 반(反) 중앙집중적인 계획의 실행이 그의 리더십 요체다.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

⑤줄루(Zulu, 1964)= 역시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로 19세기 말 남아프리카의 원주민 줄루족의 반란에 직면한 영국군의 이야기다. 영국군은 엄청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두 장교(스탠리 베이커, 마이클 케인)의 용감한 지휘 하에 줄루족을 물리쳤다. 두 장교의 리더십은 위기관리의 리더십, 즉 촉박한 시간과 불충분한 정보에 시달리는 한편으로 단호한 결정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신속하게 올바른 결정을 내리느냐에 관한 훌륭한 교재로 이용되고 있다.

⑥포세이돈(Poseidon Adventure, 1972)=뒤집힌 호화여객선에서 살아남은 승객들을 이끌고 생로(生路)를 찾아가는 목사(진 해크먼)가 주인공이다. 이 목사는 사람들을 지휘할 만한 배의 상급 선원도 아니고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닌데도 굳건한 방향감각과 의지로 다른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때로는 험한 소리도 해가면서 결국엔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가면서까지 확고한 지도력으로 사람들을 살려낸다.

⑦언터처블(The Untouchables, 1987)= 1930년대 금주법시대를 배경으로 FBI 수사관 엘리엇 네스(케빈 코스트너)가 부패한 경찰관들 대신 전혀 새로운 사람들로 팀을 구성해 갱들을 소탕한다. 명확한 임무 설정, 집중, 그리고 인재들의 확충과 적재적소 배치에 관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영화.

⑧볼케이노(1997)=화산 폭발과 같은 전면적인 재난이 닥친 긴급상황에서 지도자의 긴급 대처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LA 위기관리센터장(토미 리 존스)은 재난상황에서 우왕좌왕하는 듯하지만 가장 적절한 행동을 함으로써 수많은 인명을 구해내는 리더십을 발휘한다.

⑨인빅투스(Invictus, 2009)= 럭비를 통해 흑백통합, 즉 국가통합을 이루고자 한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모건 프리먼) 이야기. 남아공의 스프링복 럭비팀은 원래 백인들만으로 이루어진, 아파르트헤이드의 상징물 같은 존재였으나 만델라는 이를 흑백통합팀으로 만들어 95년 럭비 월드컵대회에 출전시킨다. 어떤 지도력이 어떻게 통합을 이끌어내는가에 관한 영화.

⑩철의 여인(Iron Lady, 2011)= 영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총리로서 과감하게 ‘영국병’을 치유하면서 11년간이나 장수한 마거릿 대처(메릴 스트립)의 전기영화.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거의 완벽한 지도력의 표본.

⑪링컨(2012)=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링컨(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전기영화. 주로 말년의 링컨을 묘사하면서 노예제 폐지를 명문화한 연방수정헌법 13조를 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한 그의 노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링컨은 민주당 의원들은 물론 노예제 폐지에 미온적인 일부 공화당 실력자들까지 설득하고 회유해 결국 성공함으로써 ‘노예해방의 아버지’가 됐다. 자기편은 물로 반대자와 정적(政敵)들까지 끈질기게 설득해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소통의 지도력’이란 이런 것임을 보여준다.

영화라고 한낱 오락거리로만 치부하지 말고 대통령을 꿈꾼다는 온갖 ‘잠룡’들을 포함해 지도자연하는 우리나라의 ‘높은 양반들’이 제발 이런 영화들이라도 보면서 리더십에 관한 공부라도 좀 하면 얼마나 좋을까.

김상온 (프리랜서 영화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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