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99>‘2인 영화’의 맛 기사의 사진
오랜만에 옛날 영화를 봤다. ‘하늘은 알고 있어요, 앨리슨씨(Heaven Knows, Mr. Allyson)’. 거장 존 휴스턴이 공동각본을 쓰고 연출한 1957년 영화다. 로버트 미첨과 데보라 커 두 명우가 주연이다. 아니 단순히 주연이라기보다 둘이 영화 전체를 끌고 간다. 영화 중간과 말미에 엑스트라들이 대거 등장하지만 그야말로 엑스트라일 뿐 러닝타임 106분 동안 오직 두 사람만 보인다.

2차대전 중 남태평양의 조그만 섬에 고립된 미군 병사와 수녀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국내에서는 코미디언 고(故) 김형곤이 출연한 연극 ‘병사와 수녀’로 더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섹시 코미디’를 표방한 국산 연극은 원작에서 얼개만 따왔을 뿐 원작과는 무관하다. 상황이 말해주는 대로 신분을 떠나 고립된 섬에 갇힌 두 젊은 남녀 사이에 뭔가 야릇한 일이 일어날 법하지만 영화는 두 남녀의 우정과 애정을 속에 간직한 채 담담하게 흘러간다. 섹스가 남녀 간 인사나 비슷하게 된 요즘 영화에 익숙한 젊은 관객들이라면 무지하게 심심하고 재미없을 게 뻔하다. 그러나 그래서 더욱 정감이 넘치는 영화다.

영화 설정 상 남자주인공 앨리슨 하사는 천애고아 출신으로 비행청소년이 돼 교정시설을 들락거리다가 해병대에 입대한, 그래서 자신의 고향과 가정은 해병대라고 말하는 거칠고 조야한 사내다. 그런 만큼 수녀에게 신체적으로 접근할 만함에도 그는 일체의 수작 부림 없이 단 한번 결혼하자고 졸랐을 뿐이다. 게다가 그 ‘프로포즈’가 거절당했음에도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녀에게 존대말(ma’am)을 깍듯이 써가며 예의를 잃지 않는다. 이처럼 터프하면서도 정중하고 조야하면서도 고귀한 인격을 지닌 이 사나이의 역할이 어찌나 마음에 들었는지 로버트 미첨은 자신이 연기한 배역 중 이 역할을 가장 좋아했다거니와 그가 역을 맡기 전 존 웨인과 커크 더글러스, 클라크 게이블, 말론 브랜도 같은 ‘상남자’ 배우들 역시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이미 1947년작 ‘흑수선’에서 수녀 역할을 연기했던 데보라 커는 또 다시 수녀역을 맡아 특유의 단정하고 고아한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특히 아직 평생서원을 하지 않은, 엄격히 말하면 견습수녀로서 믿음직하고 매력적인 젊은 병사의 애정공세에 흔들리는 것 같으면서도 경건함과 신실함을 잃지 않는, 그래서 여자가 아니라 누이 같은 정겨움을 풍겨내는 수녀의 모습을 멋지게 그려냈다. 마음속으로는 사랑하면서도 끝내 현실적으로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두 남녀를 놓고 개봉 당시 국내에서는 ‘백사(白沙)의 결별(訣別)’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헤어진다는 의미의 이 제목은 대단히 고색창연하지만 영화의 주제를 명확히 살리고 있다. 참고로 원제는 수녀가 했음직한 말이나 영화에는 그런 대사가 나오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다보니 자연스레 오직 두 사람 또는 그 이하의 배우가 상영시간 내내 영화 전체를 장악하고 끌어가는 그런 작품들이 여럿 떠올랐다. ‘2인 영화’라고나 할까. 가장 먼저 생각난 게 역시 존 휴스턴이 연출한 고전 명작 ‘아프리카의 여왕(African Queen. 1951)’이었다. 위대한 두 배우 험프리 보가트와 캐서린 헵번이 주연으로 영화는 온전히 두 사람 몫이다. 로버트 몰리 같은 명조연배우가 나오긴 하지만 영화 초반에 죽는다.

1차대전을 배경으로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영국 선교사의 누이와 내륙 하천을 운항하는 낡아빠진 조그만 증기선 ’아프리카의 여왕‘호 선장(이래봐야 선원이라고는 그 한명밖에 없다)이 독일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이야기다. 크게 보아 시대배경만 다를 뿐 전쟁의 와중에 고립된 두 사람이 적군의 눈을 피해 도망다니다 결국 적군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점에서 ‘하늘은 알고 있어요, 앨리슨씨’와 대단히 흡사한 설정이다.

사족 하나. 보가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사족 둘. 또 하나의 주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아프리카의 여왕’호는 원래 1912년 영국에서 건조된 배로 그 후 침몰, 파손 등을 겪은 뒤 복원작업을 거쳐 지금은 미국 플로리다주 키 라고의 홀리데이인 호텔 옆에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그 다음 생각난 것이 프랑스 누벨바그의 효시쯤으로 평가되는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 1959)’이다. 마르그리트 뒤라가 각본을 쓴 이 영화는 히로시마를 배경으로 과거 독일군 병사를 사랑한 프랑스 여자(에마뉘엘 리바)와 가족을 원폭으로 잃은 일본 남자(오카다 에이지)가 만나 며칠 동안 함께 하면서 기억과 망각, 그리고 사랑에 관해 대화하는 내용이다. 고전 걸작으로 추앙받는 영화지만 짤막한 플래시백과 점프컷을 많이 사용해 비선형적(non-linear)인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는 바람에 다소 혼란스럽고 지루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 영화를 70년대 서울 프랑스문화원에서 봤다.

역시 전쟁을 배경으로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이야기를 그린 ‘태평양의 지옥(Hell in the Pacific, 1968)’도 떠올랐다. 2차대전 당시 남태평양의 무인도에 표류한 미군 공군조종사와 일본군 해군장교가 적군으로서 서로 싸우다가, 또 곤경에 빠진 인간으로서 서로 협력하기도 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는 내용이다. 존 부어맨이 감독하고 리 마빈과 미후네 토시로가 주연한 이 영화는 오직 두 사람만이 출연한다는 것 때문에 개봉 당시에도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두 번씩 제작된 ‘Sleuth’는 오로지 두 사람만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2인 영화’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특이한 작품이다. 오리지널에서 주연한 마이클 케인이 리메이크에도 출연해 오리지널에서 자신의 상대역으로 치열한 연기대결을 펼쳤던 인물을 연기했기 때문이다. 조지프 L 맨키위츠가 연출한 1972년 오리지널작은 ’발자국‘, 케네스 브래너가 감독한 2007년 리메이크판은 ‘추적’이라는 국내제목이 붙었다. 원작은 앤소니 셰퍼가 쓴 희곡. 장르는 미스터리 스릴러로 ‘살인 없는 살인 미스터리’라고나 할까. 특히 두 출연자의 불꽃 튀는 심리적 싸움이 압권인 만큼 배우가 몹시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작품인데 오리지널에서는 로렌스 올리비에와 마이클 케인, 리메이크에서는 마이클 케인과 주드 로가 나왔다. 케인은 리메이크에서 올리비에가 연기했던 역할을 맡았다. 즉 두 역할을 한 사람이 시차를 두고 모두 연기한 것인데 케인이니까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재미있는 일화 하나. 케인이 올리비에와 공연할 때의 일이다. 케인은 그때 이미 위대한 배우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 올리비에를 매우 어려워해서 어떻게 불러야할지조차 몰랐다. 결국 그는 올리비에에게 어떻게 부르는 게 좋겠느냐고 직접 물어봤다. 올리비에의 대답. “물론 나는 올리비에경(Lord Olivier), 자네는 미스터 케인이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말일세. 나는 래리(로렌스의 애칭), 자네는 마이크로 하는 게 좋겠군.”

국내에서는 상영되지 않았지만 만년의 리처드 버튼이 중후한 연기를 보여준 ‘서클 오브 투(Circle of Two, 1981)’라는 영화도 있다. ‘페드라’ ‘일요일은 참으세요’ 등의 영화로 유명한 줄스 닷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버튼이 60세의 화가, 배우 라이언 오닐의 딸 테이텀 오닐이 16세 여학생으로 나와 둘이 플라토닉한 사랑에 빠지는 영화다. 캐나다에서 제작된 이 영화는 제작 당시 비록 플라토닉하다지만 ’롤리타‘적인 그 내용 탓에 현지에서도 논란이 일었던 만큼 국내에서는 상영불가일 수밖에 없었다.

이밖에 요즘 와서도 ‘2인 영화’는 심심치 않게 만들어지고 있다. 1시간 40분동안 두 주연-미국인 청년(이선 호크)과 프랑스 처녀(줄리 델피)-이 비엔나 거리를 걷고 얘기하는 게 내용의 전부인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1995)’, 월면기지에 고립된 우주인(샘 로크웰)과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의 컴퓨터 핼(HAL)을 연상시키는 컴퓨터(오직 케빈 스페이시의 목소리만 출연)가 두 주연인 멋진 SF ‘문(Moon, 2009)’과 역시 우주를 무대배경으로 한 ‘그래비티(Gravity, 2013)’. 우주공간에서 고립무원의 지경에 처한 두 우주비행사(조지 클루니와 샌드라 불록)가 출연진의 전부다.

그런가하면 인생을 반추하게 하는 대단히 연극적인 ‘2인 영화’도 있다. 배우 토미 리 존스가 연출까지 겸한 TV영화 ‘선셋 리미티드(The Sunset Limited, 2011)’. 존스와 새뮤얼 L 잭슨 두 사람이 출연해 어떤 액션도 반전도 없이 서로의 상반된 가치관과 신념체계를 말로 주고받는 이 영화는 그야말로 연극적이다. 그런가하면 거스 밴 샌트가 감독한 ‘제리(Gerry, 2002)’도 있다. 제리라는 동명의 두 남자(매트 데이먼, 케이시 애플렉)가 황무지로 트레킹을 나섰다가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야기다. 영화는 두 사람이 돌아가는 길을 찾아 헤매는 내용으로만 일관한다. 결국 한 사람은 죽지만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단순명확하다. 죽음을 막바로 대면해 눈도 깜박이지 않으려 애쓰는 것.

수많은 스타가 등장하는 올스타 캐스트에 비하면 단조로운 맛이지만 때로는 한두 명의 배우만으로도 충분히 배가 부르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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