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7일 서울옥션의 홍콩 경매에서 높이 2m가 넘는 김환기 화백의 노란색 전면 점화 작품 ‘12-Vー70#172'가 63억3000만원에 낙찰됐다. 한국 작가의 최고가 기록을 갈아치운 순간이다. 이전 최고가 기록은 역시 김환기가 보유했는데, 1972년 작 ‘무제 27-Ⅶ-72#228’가 지난 6월 K옥션 경매에서 54억원에 팔렸다. 작품 1점이 강남 30평 아파트 6∼7채 값이다. 평생 만져볼 수 없는 돈. 김환기 그림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일 뿐이다.
김환기의 ‘12-V-70 172’. 지난 11월 27일 서울옥션의 제20회 홍콩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인 63억 3000만원에 낙찰됐다. 서울옥션 제공

어쩌나. 막 거실에 걸어둘 미술작품을 구입하려고 나선 내 예산 한도는 5000만원도 아닌, 500만원이다. 그런 내게 “어서 오세요”하며 반갑게 맞아줄 ‘착한 가격의 갤러리’ 주인이 있는 곳은 어디일까. 월급쟁이 초보 컬렉터가 가야할 화랑은 따로 있다.

미술계 주요 인사들에게 현재 작품 가격이 300만∼500만원 정도이면서, 전도유망한 작가를 발굴하고 키워주는 화랑(대안공간)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표 참조>.

추천해준 곳을 일별하면 화랑가 1번지인 삼청동과 그 인근 서촌 일대의 소규모 갤러리도 있지만 상당수가 방배동, 합정동, 문래동, 성북동, 을지로 등 중심가에서 비켜있거나 아예 변두리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다. 또 기존 상업 갤러리의 시스템을 벗어나 고집과 모험심, 역량을 갖춘 젊은 작가들을 제대로 키울 수 있도록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공간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 가운데 ‘윌링앤딜링’ ‘합정지구’ ‘아트스페이스 풀’ 세 군데를 소개하고자 한다.

# 대안공간과 갤러리 사이 : 서울 서초구 방배동 윌링앤딜링

윌링앤딜링이 도대체 어떤 곳이야? 기자간담회 한 번 연 적이 없는 곳인데, 언제부터인가 그 이름이 슬슬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런 취지의 화랑을 찾는다는 얘기를 꺼내면서 알음알음 추천을 부탁할 때부터였던 것 같다.

11월 말의 평일 저녁, 방배동에 있다는 그곳을 찾아갔다. 윌링앤딜링은주택가 대로변,  1층에 고기집이 있는 상가 건물 2층에 있었다. 한쪽 코너엔 머그컵, 브로치, 에코백 등을 파는 아트숍을 갖추고 있었다. 그림은 못사도 거기에선 뭐라도 하나 살 수 있어 월급쟁이 컬렉터를 무장해제시키는 푸근함이 있었다.  럭셔리함 때문에 얇은 지갑의 초보 컬렉터를 주눅 들게 하던 삼청동 화랑가의 럭셔리한 분위기에선 맛볼 수 없는 편안함이  좋았다. 친구나 선배가 경영하는 화랑에 놀러온 기분이라고나 할까.
“500만원요? 그것도 부담스러운 가격이지요. 저건 100만원인데요, 뭐.”
갤러리 대표라기보다는 학부형 같은 편안한 느낌을 주는 김인선(45) 대표가 벽에 걸린 회화 작품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제 또래 40대 ‘학부형 컬렉터들’이 많이 찾는다”면서 “수십만원에서 100만원, 200만원대 작품이 인기”라고 했다. 화랑가와 떨어진 곳에 있는데도 입소문이 난 비결을 물었다.
“화랑의 상업적인 시스템에 구애받지 않고도 유연하게 작동되는 새로운 전시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성격요? 갤러리도, 대안공간도 아닌 새로운 무엇이죠.”

김 대표는 대안공간, 갤러리, 미술관, 비엔날레 등 성격이 다른 무대에서 다양한 경험을 거치면서 젊은 작가를 발굴할 수 있는 신개념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단다. 특히 막 발돋움한 젊은 작가를 처음부터 상업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면 그들이 제대로 클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경험에서 우러난 판단이다. 그래서 팔아주면서도 제대로 키워보자는 생각에서 윌링앤딜링을 차렸다. 갤러리처럼 작품을 판매하지만 독지가로부터 운영비를 지원받기 때문에 상업 논리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대안공간적 성격을 가질 수 있다고. 2012년 이태원 경리단길에 처음 문을 열었고 2015년 4월 이곳으로 이사 왔다.
윌링앤딜링의 강현선·호상근 작가 2인전에서 강 작가의 사진 작품이 실제 베란다처럼 벽면을 덮고 있는 모습. 윌링앤딜링 제공

마침 강현선·호상근 작가의 2인전인 ‘튀어나온 돌과 펜스전’이 열리고 있다. 네이버문화재단이 젊은 시각예술가를 지원하려는 목적으로 온라인에 소개해온 작가 가운데 선정해 릴레이로 전시를 열어주는 ‘헬로 아티스트-아트 어라운드’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서울대 서양화과 출신의 강현선 작가는 화분이 놓인 아파트 베란다 사진을 확대 출력해 전시장 벽면에 붙여놓는 작품을 선보였다. 사진은 ‘뽀샵’을 해 실제 같으면서 비실제 같은 착시에서 오는 즐거움이 있다. 한성대 서양화과 출신의 호상근 작가는 우리 사회 일상의 유머러스한 풍경을 일기처럼 색연필 등으로 드로잉한 소품 연작을 내놓았다. 차를 대지 못하게 쌓은 화분 등 주차금지 시리즈, 밤에 선캡을 한 할머니, 계단에서 발뒤꿈치 운동을 하는 아저씨 등 마음이 따뜻해지는 장면들이 많다.

# 1세대 대안공간: 서울 종로구 구기동 아트스페이스 풀

1999년 인사동에서 출발한 아트스페이스 풀은 2006년 마당이 있는 가정집을 개조한 이곳으로 왔다. 처음 오는 사람이라면 찾는데 애를 먹는다. 자하문 터널에서 넘어와 구기터널로 빠지기 전, 도무지 화랑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할 골목 안 주택가에 있다. 일단 와보면 잔디가 있는 마당이 주는 힐링의 기분에 점수를 주고 싶은 공간이다.

화랑 중심에서 탈피해 대안적 실험을 할 수 있는 전시공간을 기치로 작가, 기획자, 비평가 등 다양한 미술인들이 발의해 만들어졌다. 운영위원 외에도 작가와 비평가들로 구성된 기획자문위원도 두고 있어 전시 작가군이 신선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미술전문지 기자 출신의 이성희(38)씨가 대표를 맡고 있다.
아트스페이스 풀 ‘공감오류’전의 전시 전경. 아트스페이스 풀 제공

아트스페이스 풀에선 신진작가 지원프로그램에 당선된 젊은 작가들의 기획전 ‘공감오류: 기꺼운 만남’전이 진행 중이었다. 이 대표는 “불안하고 암울한 현실을 관찰하면서 자신만의 시각을 찾는 작가들”이라고 설명했다. 강기석 작가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 장님, 절름발이 등 타자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퍼포먼스 비디오 등을 통해 보여준다. 신정균 작가는 군대·남북관계·전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유머러스하게 다룬다. 미술강사 시절 학생들에게 그리게 한 베고니아 꽃이 북한에서 ‘김정일화’로 숭배되는 현실을 뒤늦게 안 그는, 이를 노래방 노래로 패러디했다. 박지혜 작가의 작품은 젊은 작가들의 고민을 보는 듯해 찡하다. 전시가 끝난 후 버려지거나 남는 재료를 어떻게 소진할까 고민했다는 작가. 그는 이번 전시에 그걸 재활용해 ‘밀차형 극장’인 작품 ‘배회하는 상영관’을 탄생시켰다. 마트의 커터 안에 축구장 관객석을 집어넣은 듯한 형태가 재미와 친근감을 준다.
아트스페이스 풀은 루프, 사루비아다방 등과 함께 1990년대 생겨난 1세대 대안공간의 하나다. 대안공간은 화랑이 주도하는 미술시장의 상업논리에서 벗어나 실험적이고 의미 있는 작품을 하는 젊은 작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생겨난 비영리조직이다. 작품을 팔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다.

판매보다는 창의성에 무게를 둔 실험성 강한 작품 전시가 대안공간에서 열리다보니, 대안공간은 작가 발굴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 대안공간을 거쳐 간 작가들이 의미 있는 작업을 하는 작가들에게 수여되는 크고 작은 미술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수여하는 2016년 올해의작가상을 받은 ‘믹스라이스’는 아트스페이스 풀, 루프 같은 대안공간에서 전시를 주로 했다. 조지은(41)·양철모(39) 부부가 팀을 이룬 믹스라이스는 연구 프로젝트성 작업을 하고, 그런 결과를 영상 설치 사진 등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놓는다. 오늘의작가상 후보에 오르며 이들이 선보인 작품이 그러한 예이다. 개발 중심의 한국 현대사회 속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공동체 붕괴 현상을 강제 이식당하는 식물의 이동경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개발에 밀려 인간뿐 아니라 식물도 제자리에서 뿌리 뽑혀져 이식되기 때문이다. 그런 연구 결과를 이식된 나무의 이동 경로를 좇는 영상작품 ‘덩굴연대기’, 재개발 지역에서 채집한 각종 식물 형태를 스프레이페인트를 사용해 본을 떠 제작한 벽화 등으로 보여준다.
독창성이야말로 장기적으로 좋은 작가가 될지를 가름하는 기준이 된다. 거실 장식이 목적이 아니라, 지금 당장 팔리는 작가가 아니라 훗날 미술사에 빛나거나 그래서 작품 가격이 오를 수 있는 작가를 찾고 싶다면 이런 대안공간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지 싶다. 

# 작가가 직업 운영하는 신생공간: 합정지구

지난 12월 초 서울 마포구 서교동 명성빌딩. 2호선 합정역에서 도보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서울 변두리의 전형적인 주택가 상가건물이다. 옆에는 미용실과 슈퍼마켓, 뒤에는 사우나와 시장이 있는 특징 없는 이 건물 1층에 놀랍게도 갤러리 ‘합정지구’가 있었다. 갤러리에는 ‘백야행성’이라는 기획전 포스터가 붙어 있다. 유리 쇼 케이스에는 유화 작품이 진열 중이이다. 그 앞을 아이 손을 잡은 주부가 지나가고 있었다.
지난 5일 서울 마포구의 ‘합정지구’ 전시장 앞을 동네 주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어 동네 사람들과의 교류가 활발하다. 합정지구처럼 작가들이 운영하는 갤러리를 뜻하는 신생공간이 2, 3년 전부터 서울의 변두리 지역에 생겨나고 있다. 구성찬 기자

전시장엔 독립 큐레이터 이현(25)씨가 기획해 박광수(32) 이제(37) 양유연(31) 최한결(31) 등 30대 작가의 4인의 회화·비디오·설치 작품이 선보이고 있다.
지난 5일 기획전 ‘백야행성’ 이 열리고 있는 서울 마포구 신생공간 ‘합정지구’에서 이제 대표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이 대표, 큐레이터 이현씨, 전시 디자인을 맡아준 작가 박수민, 정명우씨. 구성찬 기자

합정지구는 미술인들 사이에서는 ‘신생공간’이라 불리는 전시공간이다. 화상(畵商)들이 아니라 작가들이 운영 주체가 되는 것이 특징이며, 2,3년전부터 임대료가 싼 서울의 변두리에 하나둘씩 생겨났다. 합정지구의 이제 대표도 국민대 회화과를 나왔다.

“미술시장 침체는 계속되고 세월호 사건까지 터지며 무력해 있던 시기였어요. 뭔가 돌파구를 찾고 싶었는데, 63빌딩 스카이아트갤러리에서 작가지원 상금 1200만원을 받았어요. 이 돈을 한번 써보자 싶었지요.”

2015년 1월, 망한 카페 자리를 보증금 1000만원, 월세 70만원을 주고 임대한 ‘합정지구’는 그렇게 생겨났다. 뜻을 같이 한 30대 작가 6명이 함께 했다. 전시 때마다 도록 제작, 작품 설치, 영상 기록 등의 비용이 만만치 않지만, 작가들이 재능을 교환하는 식으로 돈들이지 않고 해결한다. 이를 테면 전시장 인테리어로 생계를 해결하는 권용주 작가가 전시 디스플레이를 해주고, 사진작가 홍철기 작가가 전시 사진을 찍어 도록을 만들어주는 식이다.

“처음엔 작가들의 연구모임 장소로 쓰면서 내 전시도 하고, 동료 전시도 하면 좋겠다고 가볍게 시작했는데, 이렇게 커졌어요.”(웃음)
합정지구에선 월 1회씩 꾸준히 전시를 해오고 있다. 작가 발굴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올 들어서는 지하 1층에 전시공간을 하나 더 마련했다. 작가 선정 기준을 물었더니 “미술관 같은 제도나, 상업적 자본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러니까 팔리는 작품보다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려는 작가, 혹은 작가로서 질문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곤 자신의 애매한 대답이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이곳에서 올 여름 개인전을 연 주황 작가의 경우 패션기업 루이까또즈에서 운영하는 강남의 플랫폼엘컨템퍼러리에서 스카우트해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여기 전시를 대형 화랑이나 미술관에서 눈여겨본다는 얘기다. 외진 곳에 위치하지만 작품도 꽤 팔려 수익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고 한다.

합정지구와 같은 신생공간은 현재 신도시(종로구 을지로 세운상가), 기고자(마포구 서강대 근처), 케이크갤러리(중구 황학동), 아카이브 봄(용산구 효창공원 인근) 등 20여곳이 운영 중이다.  임대료를 견디지 못하고 ‘휘발되듯’ 사라진 곳도 있지만  월간 미술세계 12월호가 신생공간을 점검하는 특집을 실을 정도로 미술계에서 하나의 현상이 됐다. 지갑이 얇은데다 젊은 작가들의 풋풋한 실험정신에 더 매력을 느낀다면 신생공간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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