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치면 일종의 등단인 셈이에요. 의사 제도에서 전공의로 기반을 잡기 전 거치는 레지던트 과정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어째서요?”
“몇 년 지나니 레지던시 입주 작가들이 다들 미술시장의 허리가 되어있더라고요.”

모 화랑에서 열린 하태범(1974) 작가의 개인전 개막식 뒤풀이 때였다. 하 작가를 그가 난지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해 있을 때 알게 됐다는 국공립 미술관 큐레이터 J씨는 레지던시 제도를 이렇게 비유했다. 식당은 축하하러온 선후배 작가, 비평가들로 왁자지껄했는데, 하 작가의 성공이 자못 흐뭇한지 J씨의 얼굴이 제법 불콰해져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럴듯했다. 하 작가는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수여하는 ‘오늘의 작가상’ 4명 후보에 올랐다. 최종 수상자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미술시장의 과거급제로 통하는 ‘오늘의 작가상’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미술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작지 않다.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 최종 우승자 뿐 아니라 후보에 오른 이들까지 연예기획사들이 눈여겨보는 것과 마찬가지의 시장논리가 미술계에도 작동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오늘의 작가상 후보에 오른 나현(1970), 김기라(1974) 작가 등이 모두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를 거쳐 간 걸 알고 레지던시의 파워에 다시금 놀랐다.

하 작가는 서울문화재단의 홍은예술창작센터(2013·현 서울무용센터), 국립현대미술관의 고양미술창작스튜디오(2012), 서울시 산하 서울시립미술관이 운영하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2011) 등을 두루 거쳤다. 문학상도 받은 작가가 다른 상을 또 받는것처럼 1년 단위로 계약하는 레지던시도 한번 입주한 경험이 있는 작가가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다른 레지던시에 입주하는 사례가 많다.
허수영 작가의 작품 '숲 10' (2016년 작) . 신진 작가로는 드물게 회화를 고집하지만 전통의 원근법을 전복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풍경을 그린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그런데 레지던시가 뭐냐고? 레지던시라는 용어가 낯선 분들이 적지 않을 것 같아 이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레지던시는…

미술대학을 졸업한다고 해서 누구나 예술가로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개인적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생계 문제와 창작욕구 사이에서 갈등하다 좌절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레지던시는 예술가 지망생들이 전업 작가로 자리 잡기까지의 과도기적 고민을 덜고 마음 놓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무료 또는 실비로 제공되는 작업공간을 말한다. 단순히 공간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지역 주민과의 연계 활동, 입주 작가와 교류 활동, 전시 기획 훈련, 비평가 연결 등 부가지원 프로그램도 있다. 레지던시는 예술 정책 차원에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주로 운영하지만 민간에서 운영하기도 한다. 국내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서울)창동 창작 스튜디오’, 서울문화재단의 ‘금천예술공장’, 서울시립미술관의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경기도의 ‘경기창작센터’ 등 전국에 120여 곳 이상이 운영 중이다. 과거 ‘국전(國展)’이 작가로 출세하는 등용문이었다면 국전 폐지 후에는 각종 미술상과 함께 어느 레지던시 출신인지가 작가의 중요한 이력이 되고 있다.

우리는 보통 갤러리나 미술관, 비상업적인 대안공간의 전시를 통해 작가의 작품을 만난다. 이들 공간은 무 자르듯이 비유해보자면 소매 시장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작품을 사러 도매시장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옷을 좀 더 싸게 사러 도매시장인 동대문의류상가 새벽시장을 가본 경험이 없는가. 레지던시는 그런 미술계의 도매시장 같은 곳이다. 왜냐고. 최종 컬렉터보다는 그들에게 작품을 파는 화랑의 대표나 큐레이터, 전시 기획이 필요한 미술관 학예사들이 될성부른 작가를 발굴하는 통로로 레지던시를 적극 활용하기 때문이다. 큐레이터 J씨가 말한 것처럼 수년 후 미술계의 허리가 될 작가들을 미리 만나는 것, 왠지 흥분되지 않는가.

레지던시는 대개 1년에 봄 가을 두 차례 작업실을 공개하는 오픈 스튜디오 행사를 갖는다. 오픈 스튜디오는 입주 작가들이 그간 실험하고 연구한 창작 결과물을 미술계 관계자와 가족, 시민들에게 외부에 보여주는 일종의 ‘학예회’다. 언론에서는 오픈 스튜디오 일정을 주요하게 다루지 않으므로 평소 집에서 가까운 레지던시의 홍보 담당자로에게 오픈 스튜디오 일정을 알려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좋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를 가보니

마침 레지던시 오픈 행사가 있었다. 지난 11월 18일 금요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하늘공원로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를 찾았다. 환경재생의 세계적 성공사례가 된 옛 난지도쓰레기매립지 안에 있다. 거대한 쓰레기 산이 공원으로 바뀌면서 쓸모가 없어진 침출수 처리시설을 개조해 2006년부터 30대 중심의 신진 예술가들을 지원해주는 작업 공간(스튜디오)으로 쓰이고 있다. 일요일까지 3일간 열리는 10기 입주작가의 오픈 스튜디오 첫날이다. 입주 작가로 선정되면 무료로 1년까지(외국인은 3개월) 이용할 수 있어 경쟁이 치열하다. 권용주, 박보나, 이정형, 신형섭, 허수영 등 20여명의 국내외 작가들이 29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주해 있다.

“한 번에 여러 작가 작품을 볼 수 있으니 좋지요. 거기다 작업하는 과정까지 볼 수 있어 작가로서 영감을 얻게 돼요. 저는 페인팅(회화)을 하는데, 다른 분야 작가들은 어떻게 작업하나, 보는 것도 좋고요.”
추워진 날씨 탓에 외투를 챙겨 입은 신경철(39) 작가는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5시 개막식 행사에 앞서 일찌감치 와서 작가들의 작업실을 둘러봤다는 그는 회화 작업을 하는 탓인지, 역시 회화 작업을 하는 허수영작가, 이정형 작가의 작품이 자극이 됐다고 말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운영하는 서울 마포구 난지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한 권용주 작가(오른쪽)가 지난 18일 오픈 스튜디오 행사를 찾은 손님들에게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세숫대야 등 일상 용기에 물을 채우고 거울을 꽂아 인공적으로 무지개를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지하 작업실에서 살 때 무지개를 만들고 싶었던 꿈을 구현한 장치다. 김지훈 기자

입주작가들은 한껏 흥분된 표정이었다. 권용주 작가의 방은 손님들이 온다고 정리를 했는 네도 잡동사니가 가득한 것 같았다. 창문 앞에는 대걸레, 빗자루를 거꾸로 세워놓은 게 봉보였다. 자세히 보니 빗자루 대걸레 귀퉁이에 시멘트가 돌처럼 굳어있고 거기 난(蘭)이 피어있다. 난 수집 취미를 패러디한 그의 대표작 ‘석부작(石付作)이다. 바닥 중앙에 물이 반쯤 담긴 세수대야, 그릇, 컵 등이 널려 있고 안에 거울이 꽂혀 있어 ‘이게 뭔가’ 싶다. 인공으로 무지개를 만드는 장치라고. 햇빛이 들지 않던 지하 작업실에서 작업하던 시절 무지개를 만들고 싶던 욕망을 구현한 것이라고 머리를 긁적이며 그가 설명했다.

“이런 것도 팔리나요”
“설마요”
“그럼 생계는 어떻게?”
“다른 일을 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씩 웃는데, 그의 진지한 작업 태도에 묘한 감동이 왔다. 레지던시 입주 작가들은 이렇듯 개인 작업실에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던 실험적인 작품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신형섭 작가의 방에는 선풍기가 윙윙 돌아가고 있고 한쪽 벽에 투사된 영상에는 깃털이 파르르 떨리는 장면이 이어진다. 신 작가는 “디지털 이미지가 아니라 옛날식 슬라이드 필름 안에 깃털을 넣은 것”이라며 “오래 전 시도하다가 그만 둔 작업인데 이곳에선 맘껏 하고 있다”며 웃었다.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은사자상을 받은 임흥순 감독도 입주해있다. “세계적인 상을 받았는데 아직도 레지던시에 있느냐”고 묻자 “돈이 되는 작업을 하는 게 아니다보니…”하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디어아트를 하는 박보나 작가의 작업실을 둘러보러 온 박윤경 작가는 앞뒤가 비치는 투명한 캔버스 천에 물감을 흘리듯 칠해 양쪽에서 볼 수 있게 한다. “회화, 설치, 조각 등 다른 분야의 작가들과 한 공간에서 정보를 나누며 시너지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오픈 스튜디오 때는 가족, 친지, 제자 등 ‘부른 손님’도 있지만 작가나 갤러리, 미술관 관계자들이 많이 찾는다. 서초구 예술의전당 앞에 있는 페리지갤러리의 신승오 아트디렉터는 “우리는 40대 작가 개인전을 주로 연다”면서 “이곳은 30대 위주로 입주해 있어 장기적인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가가 누구인지 살펴보러 왔다”고 말했다.

실제 레지던시 입주 작가들이 다른 갤러리에서 발굴돼 전시를 갖거나 상을 받은 사례들이 많다. 지난해 금천구의 금천예술공장을 취재 갔을 때 만난 입주 작가들을 이후 미술관 기획전이나 개인전에서 조우하면서 어찌나 반가웠던지. 레지던시 대부분이 국공립기관에서 운영하다보니 여기서 걸러진 작가라서 수준이 보장된다는 세간의 평가가 맞는 것이다.

# 레지던시의 특화된 프로그램…입주 작가들 튼실해져

레지던시는 2000년대부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문화지원사업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작업실만 제공했으나 점차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특화하는 추세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는 작가들이 기획자가 돼 전시를 여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서울시립미술관의 담당 큐레이터 박순영씨는 “개인전이 작가로 성장하는데 정말 중요하다. 전시를 직접 주관해보면 기획자의 관점에서 자신의 작품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고, 자신을 어떻게 홍보할지 전략을 세우는 훈련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봄 금천예술공장 입주 작가들이 공동작업실 입구에서 포즈를 취했다. 앞에서부터 연기백, 김세진, 리오 샴리즈, 박광수 작가. 2009년 10월 개관 이후 현재까지 25개국 230여명의 작가가 이곳을 거쳐 갔다. 곽경근 선임기자

금천예술공장은 과거 구로 공단 지역에 포함됐던 금천에 위치해 있다보니 예술을 통한 지역 재생의 목적이 커 지역 주민과의 연계프로그램이 강하다. 임흥순 작가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 오기 전 금천예술공장에 입주해 있었다. 그는 금천지역 주부 19명으로 구성된 ‘금천 미세스’와 함께 영화를 찍었다. 과거 구로공단에서 일했던 자신의 이야기, 가족을 위해 ‘공순이’로 희생했던 언니에 대한 미안함 등 개인사를 녹인 시나리오와 함께 옴니버스식 영화 ‘금천 블루스’가 탄생했다. 임 작가의 은사자상 수상작 ‘위로공단’은 ‘금천 블루스’와도 닿아 있는 셈이다.국립현대미술관의 창동스튜디오는 프로젝트 베이스로 작가를 지원한다. 따라서 스튜디오 자체가 작가들의 사무실 구실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타쿠처럼 혼자 틀어박혀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작가가 한 곳에 모여 작업하다보니 다른 작가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작업을 하는 지 경향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좋다고 입주작가들은 하나 같이 말한다.

컬렉터의 입장에서는 검증되거나 검증될 찰나에 있는 작가의 작품을 사는 것이 좋다. 그 많은 미대 졸업생들 가운데 ‘될 성 부른 나무’를 찾는 건 해변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 어렵다. 레지던시라는 ‘체’를 통해 전문가들이 한번 걸러준 작가를 만나는 거야말로 ‘컬렉션의 첩경’일 수 있다. 특히 거실을 멋있게 장식하는 수준을 넘어 ‘안목 높은 후원자’의 기분을 살짝 맛보고 싶다면 레지던시 입주 작가를 눈여겨볼 것을 권한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더 보기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