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100>法治와 법정영화 기사의 사진
법은 아주 옛날 왕조시대부터 존재해왔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성립과 함께 법은 근대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됐다. 우리나라가 지금 ‘최순실 사태’로 이 모양이 된 것도 법을 마치 장식품 정도로 여겨 권력자가 법을 마음대로 주물럭대던 왕조시대의 유풍이 남아있어서이거니와 우리와 대조적으로 오직 법이 지상(至上)의 가치로서 상대적으로 만인에게 평등한 나라가 대표적 다인종, 다문화사회인 미국이다.

그럴 만도 하다. 고유한 전통과 관습을 지닌 채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 윤리의식도 행위규범도 제각각인 이들을 묶어서 하나의 국민으로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서로 다른 윤리관과 도덕률 위에 존재하는 보편적이고도 강압적인 굴레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법이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면서도 그것들을 모두 아우르는 단일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근본적인 힘.

국무총리를 걸핏하면 영의정 혹은 정승이나 재상으로 표현하는 데서 보듯 아직도 왕조적, 전근대적 사고가 남아있는 우리의 경우 법은 감상과 온정에 뒤질 때가 많다. ‘떼법’이란 말이 그 증좌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법은 결코 감정, 감성의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사소한 법이라도 법을 다루는 데는 합리와 이성이 우선돼야 하며 극도의 신중함, 치밀함이 요구된다. 법이 무너지면 사회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우리와는 딴판으로 미국 영화에는 법정드라마가 많다. 근본적으로는 법을 중시하는 사회기풍 때문일 것이나 원고측과 피고측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날카로운 법리, 논리 공방과 그에 따른 의외의 결말 등 재미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극장용 영화는 아니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TV드라마를 돌이켜보자.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페리 메이슨’. 얼 스탠리 가드너가 형사변호사 페리 메이슨을 주인공 삼아 써낸 법정추리소설 시리즈를 바탕으로 한 이 단막물 드라마 시리즈(미국 방영 1957~1966)는 정의로운 주인공 페리 메이슨이 조력자 사립탐정과 함께 철저한 수사와 냉철한 추리로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을 위기에 처한 무고한 피고인들을 구해내는 내용이었는데 법이라고는 ㅂ자도 몰랐던 때였지만 페리 메이슨이 치열한 법정공방을 통해 검찰측을 몰아붙인 끝에 재판에서 이기는 장면을 보면서 법정영화의 맛을 알았다.

최근에 이런 변호사 얘기를 그린 법정영화를 한편 봤다. 코트니 헌트라는 여성감독이 연출하고 키애누 리브스와 르네 젤위거가 공연한 ‘순수한 진실(Whole Truth, 2016)’이라는 영화였다. 만년 청년 같은, 그러나 어느새 나이를 먹은(54세) 풍채가 여실한 리브스가 제법 관록있어 보이는 피고인측 변호인으로, 르네 젤위거가 아버지를 죽인 혐의를 받고 있는 10대 청소년의 엄마로 나오는 이 영화에서 리브스는 의뢰인이 과연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의뢰인을 감옥에 보내지 않는 것뿐이다. 그의 독백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재판을 하다보면 (피고인측) 변호사는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설 때가 온다. 의뢰인의 안전이냐, 순수한 진실이냐.”

리브스는 결국 의뢰인의 안전을 선택하지만, 그래서 피고인 자신의 예상치 못했던 도움을 받아 재판에서 무죄 평결을 이끌어내지만 많은 법정영화들이 그런 것처럼 그 뒤에는 놀라운 반전(反轉)이 기다린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이 반전을 위해 스토리가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선지 법정드라마 특유의 긴박감이라든지 법의 냉엄함 같은 것들이 그다지 잘 살아있는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에 따라 거의 비슷한 소재를 변호사가 아닌 배심원의 시각으로 그린, 어쩌면 법정드라마 중 가장 유명한 명화로 추앙받는 영화가 떠올랐다. 시드니 루멧의 장편 데뷔작으로서 감독 데뷔작 가운데 최상급으로 평가받는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 1957)’이다.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있는 10대 청소년에 대한 재판이 열린다. 재판을 지켜본 12인의 배심원들은 누구나 소년의 유죄를 확신한다. 딱 한사람만 빼고. 8번 배심원(헨리 폰다)이다. 그는 ‘합리적 의심’을 자꾸 불러일으켜 처음에는 철옹성 같던 다른 배심원들의 마음을 허물기 시작한다. 길고 지루한 시간이 지난 뒤 결국 그는 다른 배심원들을 설득해 배심원단 전원 무죄평결을 이끌어낸다. 폰다를 비롯해 리 J 콥, 잭 워든, 마틴 발삼 등 훌륭한 조연들의 명연기도 빛을 발하거니와 거의 영화 전편(러닝타임 96분 가운데 93분)을 채우는 좁고 찌는 듯한 더위 속의 배심원실 풍경을 잘 이용해 긴박감을 살린 루멧의 연출력은 가히 발군이다. 꼭 봐두어야 할 영화로 강추한다.

아닌 게 아니라 미국변호사협회(ABA)도 1989년 최고의 법정영화 10편을 선정하면서 이 영화를 1위에 올려놓았다. ABA가 선정한 최고의 법정영화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보자.

②4계절의 사나이(A Man for All Seasons, 프레드 진네만, 1966). 영국의 헨리8세(로버트 쇼)와 토머스 모어(폴 스코필드) 간의 대립과 법정싸움을 그렸다. 역사적 사실과 함께 법에 관한 오랜 질문, 왕(최고권력자)은 법 위에 있는가를 고찰한 영화다. 아카데미 작품, 감독, 남자주연상(스코필드)을 받았다.

③살인의 해부(Anatomy of a Murder, 오토 프레민저, 1959). 아내를 강간했다는 술집 주인을 사살한 군장교를 변호하는 작은 마을의 변호사(제임스 스튜어트) 이야기. 이미 용의자가 피해자에게 총을 쏘는 장면이 목격된 데다 스스로 자백까지 한 만큼 변호사는 피고인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보다 ‘불가항력적 강박증’이라는 일시적 정신착란증세로 끌고 가 무죄평결을 얻어낸다. 그러나 영화는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또 선악 구분에 대한 어떠한 쉬운 해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나중에 ‘패튼 대전차군단(1970)’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명우 조지 C 스코트의 실질적 데뷔작으로 그는 스튜어트의 상대역으로 대도시에서 온 거물 검사를 연기했다. 법정드라마의 고전.

④신의 법정(Inherit the Wind, 스탠리 크레이머, 1960). 1925년 미국 테네시주의 한 교사가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쳤다하여 기소된 실화에 기초한 법정드라마. 당시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으로 전 대통령 후보이자 성경학자로서 교사의 처벌을 주장하는 주 검찰로 프레데릭 마치, 이에 맞서 진화론과 피고를 옹호하는 저명한 변호사로 스펜서 트레이시가 나와 팽팽한 연기대결을 펼친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 진화론과 창조론 간의 법정다툼을 그리고 있지만 한편으로 맥카시즘에 대한 우화로도 읽힌다.

⑤뉘른베르크 재판(Judgement at Nuremberg, 스탠리 크레이머, 1961). 2차대전 후 1948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전범 재판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 판사에 스펜서 트레이시, 미군측 검찰관에 리처드 위드마크, 나치 법률가 피고인에 버트 랭카스터, 피고인측 변호인에 맥시밀리언 셸(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기타 몽고메리 클리프트, 말렌 디트리히, 주디 갈랜드 등 초호화 올스타 캐스트가 출연한 흑백영화다. 피고인을 저명한 나치 독일의 법률가들로 설정함으로써 잘못된 권력과 정부, 법률 하의 법률가의 역할과 책임, 개인적 양심 등 도덕적으로 복잡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⑥영광의 길(Paths of Glory, 스탠리 큐브릭, 1957). 1차대전을 배경으로 자살 공격임무를 거부해 군사재판에 회부된 프랑스군 병사들을 변호하는 군 법무관(커크 더글러스) 이야기. 그릇된 명령 등 스스로의 잘못을 완강하게 인정하지 않으려는 군대의 경직성과 잔인성을 고발하는 반전(反戰)영화다.

⑦심판(The Trial, 오슨 웰스, 1962). 프란츠 카프카의 유명한 동명소설을 웰스가 직접 각색까지 한 고전 걸작. 요세프 K(앤소니 퍼킨스)라는 관리가 무슨 죄인지 명확하지도 않은 범죄의 혐의를 받고 계속 재판을 받는다.

⑧ 누명쓴 사나이(The Wrong Man, 앨프릿 히치콕, 1956). 히치콕 영화치고는 드물게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 착각한 증인들로 인해 전혀 하지도 않은 강도짓을 한 것으로 몰려 재판정에 서게 된 음악가(헨리 폰다)의 이야기.

⑨앨라배마에서 생긴 일(To Kill a Mocking Bird, 로버트 멀리건, 1962). 대공황시기 미국 앨라배마주의 소도시에서 벌어진 백인 여성 강간 살해사건의 범인으로 몰린 흑인을 변호하는 백인 변호사(그레고리 펙) 이야기. 하퍼 리의 소설이 원작이다. 당시 인종적 편견과 증오가 만연한 앨라배마주 시골 상황에서 도덕적, 인간적으로 옳은 것을 위해 매진한 백인 변호사 역을 연기한 펙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와 함께 나중에 ‘부드러운 자비(Tender Mercies, 1983)’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는 연기파 로버트 듀발이 말도 못하는 동네 바보로 얼굴을 비친다. 그의 데뷔작이다.

⑩폴 뉴먼의 심판(The Verdict, 시드니 루멧, 1982). 루멧이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만든 지 25년이 지나 다시 만든 법정 드라마. 오슨 웰스의 ‘심판’과 구별하기 위해서인지 국내 제목은 ‘폴 뉴먼의 심판’이었다. 술에 찌든 영락한 변호사 폴 뉴먼이 의료사고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의뢰인을 대리해 처음엔 돈 몇푼으로 합의하려다가 각성, 거대 의료집단의 불의에 결연히 맞서 법정에서 싸우는 드라마. 뉴먼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꼽힌다. 상대 변호사로는 명우 제임스 메이슨이 나왔다.

이처럼 ABA가 선정한 10대 영화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법정영화를 거론할 때 빠져서는 안될 영화들도 있다. 우선 떠오르는 게 애거서 크리스티 원작을 영화화한 ‘검찰측 증인(Witness for the Prosecution, 빌리 와일더, 1957)’이다. 명우 찰스 로튼과 말렌 디트리히가 기막힌 연기를 보여준 이 영화는 크리스티 원작답게 반전(反轉)이 키포인트인 법정영화 중에서도 그 멋진 반전으로 유명하다. 또 조디 포스터가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피고인(The Accused, 조나산 캐플런, 1988)’도 있다. 집단성폭행 당한 피해자의 법정투쟁을 묘사한 이 영화는 실화가 바탕으로 미국영화사상 최초로 강간을 직접적으로 다뤘다. 포스터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밖에 89년 이후에 제작됨으로써 ABA 리스트에는 끼지 못했으나 놓치기 아까운 작품들로는 ‘순수한 진실’과 비슷한 소재의 법정드라마인 ‘프라이멀 피어(Primal Fear, 그레고리 호빗, 1996)’가 있다. 가톨릭 성직자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있는 복사(服事)소년(에드워드 노턴)의 순진무구한 모습에 미혹당해 무죄를 굳게 믿는 변호사(리처드 기어)가 결국 그를 무죄로 만드는 데 성공하지만 무죄판결을 받은 소년이 태도를 돌변해 흉악한 살인자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반전이 충격적인 영화다. 노턴은 놀라운 양면연기를 호연한 이 데뷔작으로 골든 글로브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와 함께 또 다른 군대 법정영화로 ‘어 퓨 굿멘(A Few Good Men, 로브 라이너, 1992)’도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동료 병사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있는 두 해병대원을 젊은 해군 법무장교(톰 크루즈)가 변호하는 과정에서 군내에 만연된 폭력을 들춰낸다는 이야기로 이 역시 군대의 잘못된 관행을 고발하고 있다. 잭 니콜슨은 오히려 잘못된 관행을 옹호하는 고집 세고 완강한 구식 해병 지휘관역으로 대단히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밖에도 좋은 법정영화들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하나, 칼 같은 법치의 중요성이다. 무늬만 법치국가인 우리나라에서도 법치를 강조하는 좋은 법정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김상온 (프리랜서 영화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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