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시골 할머니집 앞 냇가 살얼음판 위에서 논 적이 있다. 얼음 밑 흐르는 물이 보일 정도의 얇은 살얼음판인데도 그 동네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다녔다. 덩달아 뛰어 놀겠다며 나섰지만 얼마 못 가 무릎까지 물에 젖고 말았다. 피해야 할 곳을 아는 토박이 애들과 같을 수는 없었다.
어젯밤 인영이가 갑작스런 고열이 난 뒤 24시간 가량을 긴장 속에 지내다 한숨을 돌리고 나니 어릴적 그 기억이 떠올랐다. 집중 항암치료를 마친 뒤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인영이를 살얼음판 위에서 무작정 뛰도록 내버려둔 게 아닐까. 인영이가 좋아한다는 생각에 마트 문화센터, 키즈 카페 등 사람 많은 곳에 많이 노출시켜 아프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이른 새벽 병원 주차장에서 진료 시작을 기다리며 자고있는 인영이.

어제 밤 11시쯤 해열제를 먹이고 2시간이 지나고 난 뒤 39.7도를 찍은 인영이 상태를 확인한 뒤 우리 부부는 당황했다. 이제 또래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방심하는 마음에 카운터펀치를 한방 맞은 듯했다. 아내는 울 듯한 표정으로 조용히 입원에 필요한 짐을 쌌다. 자정이 다될 즈음 아내는 원칙대로 응급실에 가자는 뜻을 내비쳤다. 백혈병 환아들은 해열제를 먹여도 열이 38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면 바로 응급실에 오라고 교육을 받는다. 하지만 나는 이른 새벽에 출발해 아침 일찍 외래치료를 받자고 아내를 설득했다. 몇 시간 먼저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벽 응급실의 간이침대에 인영이를 눕히고 여기저기 바늘을 찔러대는 걸 피하고 싶었다. 인영이도 응급실에 갈 정도는 아니라고 시위를 하듯 오한에 덜덜 몸을 떨면서도 계속 떠들며 놀려고 했다.

월요일 아침 러시아워를 피하려 새벽 5시에 출발했다. 7시30분에 도착해 병원 주차장에서 세 가족 모두 잠시 눈을 붙였다. 다행히 외래치료에서 혈액수치는 정상이었고, 독감검사도 음성으로 나왔다. 하지만 인영이는 열이 내리지 않고 전날 밤과 달리 축 처졌다. 의사선생님은 집이 멀고 하니 입원을 해서 열이 잡히면 갈 것을 권했다. 입원 병실을 알아보려는 나를 이번에는 아내가 만류했다. 입원하면 바로 항생제 투여를 할 것이고 그러면 최소 5일은 병원생활을 해야 하는데 자신이 없다고 했다. 지금은 열 감기 같은데 오히려 병원에서 독감이 옮을 수도 있다는 이유도 들었다. 아내 말에 따르기로 하고 인영이를 태우고 집에 도착하니 4시였다. 다행히 인영이는 밤이 될 수록 컨디션이 좋아져 미열로 떨어졌고 12시에 곤히 잠들었다.
인영이는 입원을 직감했는지 "엄마, 오늘 밤에 병원에서 자?"라며 울먹였다. 입원하지 않고 집에 온 것은 잘한 선택같다.

아픈 아이를 키우는 데는 선택하고 결정할 것이 많다. 당장 인영이는 감기약을 먹으면 항암약은 건너뛰어야 한다. 감기약과 항암제 중 부모는 선택해야 한다. 평소에도 또래 아이들과 어느 정도 어울리게 해야 하는지부터 시작해서 항암치료를 입원해 받을 것인지 출퇴근할 것인지, 응급실을 갈 상황인지 아닌지 등 결정은 부모 몫이다. 그래서 이 병은 못 고칠 병은 아니지만 한시라도 방심해선 안되는 병이라고 환아 부모들끼리 서로 다독이곤 한다.
병원 휴게실에 비치된 책 중 인영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올 크리스마스엔 '우리 아이들'이 무적의 독감 백신을 선물받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런 부모의 결정보다 본질은 오롯이 이 병과 사투를 벌이는 환아 자신들이다. “인영이가 지금 균과 열심히 싸우는 중”이라는 교수님 설명처럼 부모나 의료진이 대신 이 병과 싸워줄 수 없다.
“독감에 걸리면 보통 아이들은 타미플루를 5일 먹고 끝나지만 우리 아이들은 열흘 먹어야 해요.”
독감 검사를 받으면서 의사선생님이 의무적으로 한 말을 들으며 왠지 울컥했다. 의료진과 환우 가족들은 인영이와 친구들을 ‘우리 아이들’이라고 표현한다.
우리 아이들... 아무런 죄도 없는데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먹고, 독한 항암 약에 머리카락이 빠지고, 어른들도 참기 힘들다는 골수·척수검사를 장기간 견뎌야 하는 우리 아이들.
언제 깨질지 모를 살얼음판을 조심조심 걸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우리 아이들.
그런 ‘우리 아이들’은 국내에만 만명이 넘는다. 주변에서 까까머리에 마스크를 하고, 눈만 빼꼼히 내놓은 우리 아이들을 보게 되면 이상하게 쳐다보지 말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줬으면 한다. 우리 아이들은 틀린 게 아니라 조금 다를 뿐이다. 그 어떤 아이들보다 사랑받고 존중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올 크리스마스에는 산타할아버지가 자는 우리 아이들에게 무적의 독감백신을 놔주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청문회서 바른 '2300원짜리' 립밤 화제 [꿀잼포토]
▶보니하니에 나온 정유라… 샤넬 쇼핑백 든 최순실 영상 [꿀잼 영상]
▶'성추행 몰카' 찍힌 칠레외교관에 대한 교민 반응(영상)
▶'박근혜 5촌살인' 그알, 방송직전 삭제됐었다(영상)
▶"일단 몸 사리셔야" 이완영 움찔하게 만든 문자 주목
▶횡설수설 최순실, “혐의 인정 못하나” 질문에… “네”
▶촛불집회 본 최순실 "공포스럽다 내가 죽일 사람인가"
▶박사모 계속되는 굴욕… 이번엔 '에젤 박근혜'에 당했다


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


더 보기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