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101> “왜 다시 만들었지?” 기사의 사진
두 편의 리메이크 영화를 봤다. ‘벤허’와 ‘매그피센트 7’. 아이디어 빈곤 탓인지, 유명 원작에 기대 손쉽게 돈을 벌어보려는 속셈인지 리메이크 영화가 워낙 많이 쏟아져 나오니 안 볼 도리가 없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대체 왜 다시 만들었을까”다. 안 만드는 편이 훨씬 좋았다는 얘기. 이 두 영화의 오리지널은 어디 내놓아도 ‘걸작’ ‘명작’ 대접받는 작품들이다. 반면 리메이크 영화들은 ‘걸작’ ‘명작’은커녕 ‘범작(凡作)’이라고도 할 수 없다. 오리지널에 누를 끼친 범죄적 작품, 즉 ‘범작(犯作)’이라 해서 지나치지 않다.

2016년판 ‘벤허’는 한마디로 전차경주를 다룬 ‘유사 스포츠영화’다.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서사극의 외피를 입힌. 125분에 이르는 러닝타임은 10분 남짓한 전차경주를 위한 전개이고 결말일 뿐이다. 물론 전차경주 장면은 훌륭하다. 영화사상 최고의 장면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오리지널의 전차경주 장면보다 뛰어나다고 해도 좋다. 카자흐스탄 출신의 티무르 베크맘베토프 감독은 역동성과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 최대한 컴퓨터 그래픽을 자제했다지만 그럼에도 그 멋진 장면의 바탕에는 놀랍게 발달한 영화기술이 깔려있다.

그러나 윌리엄 와일러의 59년판 ‘벤허’가 보여주는 신화적인 영웅담과 그리스도의 사랑과 기적 이야기(루 월러스 장군이 1880년에 출간한 원작소설과 59년판 ‘벤허’에는 ‘A Tale of the Christ’라는 부제가 있다)는 어디론가 날아갔다. 유대귀족 벤허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과 이를 극복하는 영웅적 의지, 그리스도에의 귀의 같은 서사적 내용들은 영화에 들어있긴 해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영화 최대의 스펙터클인 전차경주에 너무 치중했기 때문이다.

당초 제작진은 ‘벤허’의 리메이크를 발표하면서 단순한 리메이크가 아니라 원작 소설의 ‘재해석’임을 강조했다. 그래서 나온 결과는? 59년판에서는 화면에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예수가 얼굴을 드러내면서 말까지 하고, 종래 금발에 파란 눈의 백인 전용이었던 예수 역할을 파격적으로 브라질 배우(로드리고 산토로)에게 맡기는가 하면 벤허의 후원자가 되는 부유한 아랍 족장(59년판에서는 휴 그리피스가 연기했다)을 누비아인, 즉 흑인(모건 프리먼)으로 바꿔놓은 정도였다. 참 대단한 ‘재해석’이다.

결국 ‘벤허’를 보고 나니 머리에 남은 것은 전차경주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70년대 초 국내에서 상영했던 ‘매쉬(MASH, 로버트 올트먼, 1970)’와 똑같다. 한국전쟁을 다룬 블랙코미디인 ‘매쉬’가 ‘벤허’와 비슷하다고? 사정인즉슨 이렇다.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는 등 당시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던 ‘매쉬’는 노골적인 반전(反戰)메시지에다 과감한 섹스 코미디, 그리고 마약 상용 등 국내에서는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있었으므로 누구나 국내 개봉이 안 될 것으로 생각됐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극장에 간판이 걸렸다. 이게 웬 일이냐 하고 기대에 부풀어 극장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거의 모든 내용이 무참하게 가위질되고 남아있는 것은 그나마 ‘건전하다’고 여겨진 군인들 사이의 부대 대항 미식축구경기였다. 물론 중요한 시퀀스지만 어디까지나 영화 전편의 흐름과는 상관없는 에피소드성 사건이었음에도 거의 잘리지 않고 상영된 건 그 경기 장면밖에 없었던 것. 그러다보니 ‘매쉬’는 야전이동병원의 군의관들 이야기가 아니라 아마추어 미식축구경기 영화가 돼버렸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저런 필름은 밀짚모자의 테로나 써야 한다고 투덜대던 기억이 난다. 다만 ‘매쉬’가 그렇게 된 건 무식하고 무지한 옛날 한국 영화검열자들 탓이었다면 ‘벤허’는 오리지널의 이름만으로 돈 좀 벌어보려는 영화장사꾼들 탓이라고나 할까.

사족① 2016년판 ‘벤허’역을 맡은 잭 휴스턴은 거장 존 휴스턴의 손자이자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앤젤리카 휴스턴의 조카인데 휴스턴 집안과 59년판 ‘벤허’ 찰턴 헤스턴과는 교분이 있는 사이여서 어릴 때 헤스턴을 몇 번이나 직접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헤스턴의 뒤를 이어 2대 벤허가 된 데 대해 ‘믿을 수 없는 영광’이라며 감격해했다고. 그만큼 헤스턴 하면 벤허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막상 와일러 감독은 나중에 헤스턴의 연기에 못마땅함을 표시했고 뉴욕타임스도 헤스턴이 마치 레코드로만 배운 영어를 말하는 것 같았다고 비판했다.

사족② 인터넷 영화평을 뒤지다보니 그래도 괜찮다는 호평을 하는 관객들은 거의 대부분 59년판 벤허를 보지 않은 이들이었다. 본 사람들 가운데는 59년판이 너무 길어 지루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하긴 ‘무슨 무슨 맨’류의 톡톡 튀는 영화에 익숙한 이들에게 그 유장한 대하서사시적 영화의 흐름이 얼마나 지루하고 갑갑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길고 지루하다고해서 고전 소설들을 읽지 않는 게 옳지 않듯 고전 걸작 영화들도 봐두는 게 옳다. 그래야 감식안(鑑識眼)이 생긴다. 또 리메이크만 보고 그것이 정석(定石)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도 바로잡을 수 있다.

‘매그니피센트 7’은 어떤가. 새로운 영화라는 느낌을 주려 해서 그랬는지 1960년판이 개봉됐을 때 붙여졌던 ‘황야의 7인’이라는 괜찮은 우리말 제목(사실은 일본제) 대신 요즘 유행하는대로 영어를 우리말로 읽어서 나는 소리를 그대로 제목으로 썼지만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물론 서부극의 거장 존 스터지스 감독의 60년판과 확연히 달라진 건 있다. 이른바 ‘진보’ 또는 ‘정치적 올바름’의 풍조를 반영한 것인지 과거라면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마이너리티(소수인종)들의 등장이다.

멕시코인 한명을 빼고는 주인공들이 모두 그링고(미국 백인)였던 60년판에 비해 흑인감독 앙트완 후쿠아가 연출한 16년판에는 아메리카 인디언 한 명, 동양 남자 한 명, 멕시코인 한 명이 백인들 사이에 끼어있으며 가장 결정적인 것은 과거 율 브리너가 맡았던 주인공들의 대장격으로 흑인(덴젤 워싱턴)이 나온다는 것. 7인의 주인공 중 오직 그만이 율 브리너와 맞먹는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나머지는 60년판 주인공들과 대비시키기조차 어렵다. 60년판에서는 브리너와 비슷한 존재감을 보여주었던 스티브 맥퀸역을 맡은 크리스 프랫 역시 비중 있게 영화에 등장함에도 맥퀸 만큼의 존재감을 과시하지 못했다. 다만 ‘칼의 달인’이라는 점에서 60년판의 제임스 코번역이랄 수 있는 이병헌은 코번보다는 오리지널의 오리지널 ‘7인의 사무라이’에 나왔던 미후네 토시로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킬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김으로써 앞으로 할리우드에서 더욱 발전해나갈 소지를 보였다.

내용 역시 60년판에 비해 만족스럽지 못하다. 우선 전반적으로 영화는 대형 액션에 치중함으로써 ‘황야의 7인’보다는 차라리 ‘와일드 번치(샘 페킨파, 1968)’의 리메이크 같다는 느낌을 준다. 60년판에서 7명의 무법자와 오합지졸에 가까운 수십명의 멕시코 산적들이 투닥거리던 게 16년판에서는 7명 대 잘 조직된 수백명의 고용 총잡이들로, 그것도 개틀링 기관총으로 무장까지 한 악당들을 상대하는 대량 살상극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악역 역시 일라이 월라크가 호연한 무식하지만 먹고살기 위해 나쁜 짓을 하는 멕시코 산적 두목 칼베라에 비해 오로지 돈을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악덕 자본가(피터 스카스고르)가 악행의 규모는 크지만 오히려 왜소한 인형극의 악당처럼 보인다. 캐릭터와 연기력의 차이다. 이밖에 이병헌과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칼질과 총질 액션은 한눈에 보기에도 홍콩영화의 복제품이다. 60년판 처럼 자연스러운 전통적 서부극 액션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지나치게 조작적이고 인위적이어서 낯설고 어색하다.

사족① 영화에는 오마주가 두 군데 나온다. 첫째, 크리스 프랫이 5층에서 떨어지는 사나이에 관한 농담을 하는 장면. 5층에서 어떤 사나이가 추락하면서 층마다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아직까진 괜찮아(So far, so good)”라고 한다는 농담인데 60년판에서도 스티브 맥퀸이 같은 농담을 했다. 다만 5층이 아니라 10층으로. 맥퀸에 대한 오마주다. 둘째는 7인 중 하나인 아메리카 인디언의 이름. 그의 이름은 ‘피의 수확(Red Harvest)’인데 이는 미국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비조인 더쉴 해미트의 클래식 걸작 제목이다. 해미트의 이 작품은 ‘매그니피센트 7’의 원작의 원작 ‘7인의 사무라이’를 만든 일본의 명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또 다른 걸작 ‘요짐보’의 원안이다. ‘요짐보’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로 다시 태어났다. 그런 만큼 이 아메리카 인디언의 이름은 해미트에 대한 오마주다.

사족②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그리운 명곡이 흘러나온다. 엘머 번스타인이 만든 60년판의 주제곡이다. 16년판의 음악을 담당한 제임스 호너(영화가 완성되기 전에 사망했다)도 훌륭한 영화음악가지만 최고의 영화음악가 중 한사람인 엘머 번스타인이 작곡한 이 주제곡은 역대 모든 서부극을 통털어 최고의 주제곡 중 하나로 꼽힌다.

리메이크는 폄하하고 오리지널만 칭찬하기도 지쳤다. 오리지널은 이제 그만 쉬시라고 할 만한 리메이크 영화는 정녕 없는가.

김상온 (프리랜서 영화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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