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AP뉴시스

사무라이는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 초대 쇼군 집권과 일본 전국시대의 종결로 가장 먼저 힘을 잃은 계층입니다. 앞서 500년 동안 일본 전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지만 상인과 수공업자가 핵심계층으로 떠오른 17세기부터 존재할 이유도, 생존할 방법도 없었죠. 새로운 시대는 더 이상 칼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날카로운 칼보다 온화한 무기가 필요했습니다. 사무라이는 맨손으로 싸우는 비무장전투, 즉 무술로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사무라이가 무장해제를 당하고 완전히 몰락한 1868년 메이지유신까지 검술은 존재했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칼 없이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무술을 더 선호했습니다. 부드러운 무술이라는 뜻의 유도(柔道)는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유도의 창시자는 일본 교육자 가노 지고로(1860∼1938년)입니다. 메이지유신 체제는 야구 농구 육상 등 서양식 스포츠를 현대화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가노는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일본의 정통성을 주창한 교육자였죠.

 가노는 에도막부 때부터 여기저기 흩어졌던 일본의 전통무술과 전투체계를 수집했습니다. 사무라이의 잔인하고 위험한 살인술을 버리고 메치기 굳히기(조르기·꺾기) 급소지르기 등 3가지 기술을 채택해 유도를 완성했습니다. 가노는 1882년 도쿄에 최초의 도장 코우도관(講道館)을 설립하고 유도를 전수했습니다.

 가노는 유도를 통해 고귀하고 활기찬 성품을 전파하고 싶었습니다. 폭력·살인이나 비뚤어진 민족주의의 선전도구로 전락하지 않길 원했습니다. 가노의 이런 정신을 계승한 제자들은 미국 러시아 프랑스 네덜란드 브라질 등 세계 곳곳에 도장을 세웠습니다. 러시아의 삼보, 브라질의 주짓수는 모두 유도를 변형한 무술입니다.

 하지만 일본이 한국 중국 등 주변국을 침략하고, 1928년 가노가 사망하면서 유도는 한때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변질됐습니다. 그 결과 존폐위기에 몰렸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해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유도를 제국주의의 부산물로 보고 금지했습니다. 유도는 무술보다 스포츠에 가까운 형태로 변형한 1951년 겨우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세계인이 즐기는 스포츠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유럽과 미주 이외의 대륙에서 방법과 규칙을 수립한 최초의 올림픽 정식 종목입니다.

 우리에게 태권도가 그렇듯 유도에 대한 일본인의 자부심은 남다릅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위해 찾아온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지난 16일 수도 도쿄에 있는 유도 성지 코우도관으로 부른 이유는 어쩌면 그래서였을 겁니다. 푸틴 대통령은 유단자입니다. 국제유도연맹(IJF) 공인 8단이죠. 지금은 IJF 명예회장입니다. 그런 푸틴 대통령에게 코우도관에서 선보인 유도 시연은 아베 총리가 야심차게 준비한 ‘접대’였을지도 모릅니다.

 푸틴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3000억엔(약 3조원) 규모의 경제 협력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아베 총리에게 진짜 목적이었던 쿠릴열도 4개 섬 영유권 분쟁을 둘러싼 평화조약은 체결되기는커녕 진전조차 없었습니다. 아베 총리는 푸틴 대통령의 2시간 지각을 모두 기다렸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지지율이 5.9%포인트나 폭락할 정도로 아베 총리에겐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안긴 외교적 수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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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틴 대통령의 코우도관 방문은 방일 일정의 마지막 날 이뤄졌습니다. 아베 총리의 머릿속에는 뒤집기 한판은 어려울지 몰라도 절반 정도는 빼앗을 복안이 있었을 겁니다. 일본 공영방송 NHK는 코우도관에서 두 정상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고 전했습니다. 푸틴 대통령이 아베 총리에게 “직접 유도를 시연하면 어떻겠느냐”고 웃으면서 제안했고, 아베 총리가 “그래 보겠다”고 농담으로 받아칠 정도였다고 하니 분위기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해진 분위기와 다르게 유도 시연에서는 푸틴 대통령의 표정이 시큰둥했습니다. 사무라이 복장을 입은 유단자들의 시연에서 푸틴 대통령은 딴청을 부리거나 다소 무성의하게 박수를 치는 모습이 포착됐습니다. ‘어쩌라는 것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두 손을 벌렸다가 뒤늦게 분위기를 맞추려는 듯 주변 사람들과 함께 박수를 친 모습까지 잡혔죠.

 결례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러일전쟁 패전으로 맺은 조약을 제2차 세계대전 승전으로 무효화하고 쿠릴열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한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푸틴 대통령의 행동은 아주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 아닙니다. 제국주의 시절을 떠올리며 군사적 팽창을 노리는 아베 총리 집권 아래의 일본과 영토 문제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러시아에 썩 기분 좋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가노가 생전에 알려진 것처럼 유도를 비뚤어진 민족주의의 부산물로 전락하지 않길 원했다면, 쿠릴열도 영유권 논의를 위해 유도를 앞세운 아베 총리에게 불쾌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베 총리가 이번 정상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에게 빼앗긴 한판패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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