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민은 20대 후반에 해방을 맞았다. 일제 순사였던 그는 해방된 다음달 월남했다. 주로 경찰과 군인으로 밥벌이를 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3월 강원도경찰서에 최상훈(崔尙勳)이란 이름으로 경사로 취직한다. 이듬해 3월에는 대전경찰서 경사, 한 달 후인 1947년 4월에는 인천경찰서 경위로 승진해 옮긴다. 일제의 순사가 해방 뒤 경찰로 일한 사실은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해방정국의 혼란을 보여준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인천경찰서에서 사찰주임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다. 일제 시대 독립운동가를 감시했듯이 인천에서 불온세력을 살피는 일을 맡은 듯하다. 2년 뒤 1949년 경찰을 관두는데, 자유당과 관련된 일에 연루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1918년생이라면 그의 나이 30세, 1912년생이라면 30대 중반의 나이다. 한창 팔팔한 나이에 백수가 된 셈이다.

경찰을 그만 둔 뒤 그가 찾은 일자리는 군대였다. 1949년 9월 육군 제1사단 헌병대 비공식 문관, 1950년 7월 해병대 비공식 문관으로 일했다. 정식 군인이 아니라 군부대 주변에서 경찰시절에 해왔던 일과 비슷한 노릇을 하며 밥벌이를 한 듯 하다. 해방 직후 정부 수립기와 6.25 전쟁이라는 혼란을 겪는 와중에 그는 계속 권력의 말단에서 살았다.

그가 종교 쪽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시기는 휴전 이후인 1954년이었다. 그의 나이 마흔 전후가 되는 시기였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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