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작품을 사려면 지금까지 얘기한 대로 화랑이나 경매에 가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메이저 갤러리는 고급 부티크 같은 분위기에 주눅부터 든다. 가격을 물어보거나 갤러리 관계자에게 말을 붙이기가 쉽지 않다.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취급하는 대안공간이나 신생공간이 있다지만, 잘 아는 사람과 함께 가지 않으면, 쓱 들어가서 둘러보다 맘에 드는 게 있다고 ‘이거 얼마냐’고 묻기가 주저된다.

서울옥션, K옥션 등의 오프라인 경매장 역시 럭셔리한 분위기가 감도는 건 사실이다. 온라인 경매가 저렴하다고 해도 30초 단위로 가격이 올라갈 수 있는 상황이라 비딩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순간 판단이 쉽지 않다. 경매는 참여하려면 연습이 좀 필요하다.
대안은 있다. 아트 페어다. 다소 여유 있는 기분으로, 그야말로 쇼핑하는 기분으로 미술작품을 사고 싶다면 아트페어가 나을 수 있다. 아트페어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 유수 화랑들이 한 장소에 모여 며칠 간 작품을 판매하는 미술 장터이다.

도심 번화가의 아디다스나 나이키 개별 매장에서 운동화를 사는 건 그 브랜드 마니아에겐 좋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여러 브랜드가 한 군데 모여 있는 백화점이나 쇼핑몰에서 이런 저런 브랜드 제품을 신어보고 디자인과 가격을 비교해보며 고르는 것이 편리하면서도 실속이 있다. 아트페어가 그렇다. 갤러리 마다 내놓은 여러 미술 작품을 작가별, 장르별, 크기별로 비교 감상하고 가격도 비교해 볼 수 있어서 좋다. 아트페어에서는 미술작품이 갖는 아우라를 걷어내고 냉정하게 ‘상품’으로 바라보며 ‘쇼핑’ 하는 기분이 난다. 페어에 갈 때는 왠지 뭔가 ‘득템’할 듯한 기분에 들뜨기도 한다.

# 아트페어와 화랑에서 느끼는 기분 차이는 어디서 올까
지난 9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제2회 어포더블 아트페어에서 관람객들이 부스를 돌며 작품을 구경하고 있다. 손영옥 선임기자

화랑에 갔다가 주눅이 들었던 당신도, 아트페어에서는 ‘손님은 왕’이 된 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다. 가격을 묻는 것도 꺼리길 게 없다. 어차피 아트페어는 화랑들이 작품을 팔겠다고 작정하고 나온 장터, 그만큼 친절로 무장해 있다. 키아프의 경우 참가하는 화랑들이 부스비만 해도, 800만∼4000만원으로 적지 않은 금액이다.

그러니 잘 팔릴 수 있는 작품을 들고 나오는 것도 초보 컬렉터에게는 이점이 될 수 있다. 갤러리에서 기획전을 할 때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결정지을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더라도 아트페어에서는 아무래도 거실이나 사무실에 걸어두기 좋은 ‘무난한’ 작품을 많이 들고 나온다.
A화랑 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아트페어는 100% 판매가 목적입니다. 부스비가 얼마나 비싼데요.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들거나 우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작품은 당연히 못 들고 가지요. 선정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작품도 걸러내게 됩니다. 온 가족이 모이는 거실에 그런 걸 걸기는 껄끄럽잖아요.”
아트페어에서는 화랑 마다 취급하는 작가가 달라, 그 취향의 차이를 한자리에서 비교해 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내 스타일과 맞는 화랑이 있다면 명함을 건네고 자연스럽게 관계를 트는 기회로 삼는 것이 좋다. 일단 관심을 표명해보라. 그 쪽에서 먼저 연락처를 적고 향후의 전시 일정에 대해 메일을 보내도 될지 물어볼 것이다.

대기업 상무인 C씨도 아트페어를 통해 컬렉션을 시작한 케이스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M갤러리 단골인 그는 “10여 년 전 코엑스에서 열렸던 키아프 아트페어에 갔다가 이 갤러리에 마음에 드는 풍경화가 내걸려 관계를 트게 됐다”고 말했다. 몽환적인 느낌이 드는 시골 풍경을 그린 K작가의 유화가 맘에 들어 몇 번을 다시 와서 뚫어지게 바라보자, 화랑 대표가 친절하게 먼저 말을 붙였다. 10호 짜리유화를 당시 월급의 절반이 넘는 400만원을 주고 샀다. 이를 계기로 K작가와도 만나게 됐고 이후 그의 작품을 몇 점 더 샀다.

# 많고 많은 아트페어, 어디를 갈까

아트페어는 전국에서 30여개가 운영 중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화랑협회가 주관하는 화랑미술제와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이하 키아프), 마니프조직위원회가 주최하는 ‘마니프서울국제아트페어-김과장 전시장 가는 날’ 등으로 20년 이상의 관록을 자랑한다.
여기에 뉴욕, 암스테르담 등 전 세계 10여개 도시에서 운영 중인 글로벌 아트페어인 ‘어포더블 아트페어’가 2015년 한국에 상륙하며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방에서는 부산국제아트페어, 대구아트페어가 자리를 잡았다.
이 가운데 대표 선수인 키아프와 신생인 어포더블 아트페어를 소개할까 한다. 결론적으로, 똑같이 글로벌 아트페어를 표방하고 있지만, 거실에 장식용 인테리어 소품을 사는 기분으로 가볍게 둘러보고자 한다면 어포더블을, 그래도 미래 투자가치를 고려해 좀 더 돈 들여 작품을 사고 싶다면 키아프가 낫지 않을까 싶다.


# 거실 장식용 소품  사고 싶다면 어포더블 아트페어
2014년 10월 뉴욕에서 열린 어포더블아트페어 포스터. 작품을 산 뒤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는 젊은 고객을 이미지로 내세워 미술작품은 누구나 소장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한다. 어포더블아트페어 제공

먼저 어포더블 아트페어. ‘구입 가능한’이라는 영어 단어 ‘어포더블’(affadoble)'을 사용한 명칭에서서 짐작할 수 있듯이, 컬렉션의 대중화를 표방한 아트페어다. 어포더블 아트페어 김율희 한국지사장은 “기존 페어와 차별화하는 50만∼1000만원 이하의 대중친화적 가격대 작품으로 샐러리맨 컬렉션 시대를 열겠다”고 밝혔다.

1999년 ‘윌 람지(Will Ramsay) 페어 컴퍼니’가 영국 런던에서 시작한 어포더블 아트페어는 20년이 안되는 짧은 역사지만 그 사이 뉴욕, 암스테르담 등 전 세계 13개 도시에서 개최되며 급성장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2010), 홍콩(2013)에 이어 한국이 3번째이다.

어포더블 아트페어를 만든 영국의 윌 람지는 홍콩 바젤 아트페어 공동 창설자이기도 한데, 처음 런던의 공원에서 조그맣게 시작했던 이 아트페어가 급성장한 배경에는 ‘부담이 적은’ 가격이 있다. 1만 달러 이하의 가격을 내세워 구매 욕구는 있으나 ‘가격 벽’에 앞에서 무너졌던 30, 40대 전문직 종사자들을 끌어들였다. 예술이라는 아우라를 걷어내고 집안 장식을 위해 조각 작품을 사는 등 실용성과 함께 재미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것이 마케팅 포인트다.

광고만 봐도 알 수 있다. ‘쇼핑하듯 작품을 사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 청바지 차림의 뉴요커’ ‘쇼핑백처럼 작품을 무더기로 들고 가는 미모의 홍콩 여성.’ 예술작품 소장은 소수 부유층에게만 허용된 문화라는 통념을 깨는 장면이다. 그림을 쇼핑 하듯 부담 없이 살 수 있게 하자는 콘셉트, ‘그림의 유니클로’라고나 할까. 아트페어 폐장 시간을 평일엔 저녁 9시까지 여는 것도 직장인이 퇴근하고 올 수 있도록 배려해서다.

지난 9월 추석을 앞두고 동대문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제2회 어포더블 아트페어를 찾아갔다. 유모차 부대도 눈에 띄는 등 ‘가벼운 마음’으로 미술 쇼핑에 나섰거나 아이쇼핑을 온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부스마다 100호 이상 대작보다는 올망졸망한 크기의 소품들이 걸려 있다. 무엇보다 이 페어의 장점은 작품 가격이 바로 밑에 부착돼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가며 구입을 저울질 할 수 있다는 점이다. 1000만원 이하라고 하지만, 가장 많이 나가는 가격대는 200, 300만원대인 것으로 전해졌다. 부산에서 온 맥 화랑 장영호 대표는 “처음 구매하는 고객도 적지 않았다. 이사를 가는데 새 집에 장식용으로 걸기 위해 사는 분도 꽤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키아프와 비교해 어포더블 아트페어를 찾는 고객이 취향을 ‘집에 걸기에 편안하고, 장식하기 좋은 소품 위주’라고 정리했다.
지난 9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어포더블아트페어에서 관람객들이 부스를 둘러보며 작품을 구경하고 있다. 부스마다 걸려 있는 작품의 크기가 작고 색감이 밝은 게 특징이다. 30,40대 직장인도 많이 찾아오는 등 관람객의 연령대도 젊다. 손영옥 선임기자

또 다른 화랑 대표도 “대학원을 갓 졸업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신진작가의 작품 위주·로 들고 나왔다”며 “첫 구입자가 많아 추상 보다는 구상 작품 위주로, 또 컬러는 밝은 것으로 골랐다”고 했다. 작품성보다도 밝고 따뜻하고 친근한 이미지의 장식성 강한 작품이 잘나가는 것 같다고 참여한 화랑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영국의 YBA작가인)데미안 허스트, 마크 퀸 등 유명 화가의 원화를 프린트한 에디션도 이곳에서 잘 나가는 작품 종류 중의 하나이다.

어포더블 페어는 ‘미술 쇼핑의 시대’를 기치로 내걸고 중저가 작품을 판매하다보니 관람객은 젊은층, 작가는 신진작가, 참여화랑은 중간 규모 이하가 많다. 이른바 화랑가 1번지에 있는 작품 당 수천 만 원에서 1억원대 이상의 중견 작가를 전속으로 데리고 있는 메이저 화랑은 참여하지 않았다.

# 그래도 투자 목적이 좀 있다면 키아프로 

2002년 시작된 키아프는 아시아에선 도쿄아트페어를 제외하고 가장 오래된 아트페어다. 하지만 아시아 미술시장의 허브가 되겠다는 당초 취지는 갈수록 무색해졌다. 무엇보다 베이징, 상하이, 타이베이, 홍콩 등 아시아 주요 도시에 아트페어가 생겨나 경쟁이 사뭇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2013년 세계 3대 아트페어인 스위스 아트바젤이 홍콩의 아트HK를 인수해 아트바젤 홍콩을 시작하면서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다. 이 바람에 한국의 큰 손 컬렉터들도 홍콩 직구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키아프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

지난 10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키아프. 아무리 미술장터라고 하지만 어포터블 아트페어와는 확실히 다른 좀 럭셔리한 분위기가 있었다. 부스 사이의 넒은 복도, 훨씬 큰 부스 면적이 쾌적한 기분을 줬다. 특히 올해는 그런 느낌이 더 강했다. 키아프는 화랑협회가 주관하는 행사인데 박우홍 회장(동산방 대표)이 취임한 이후 두 번째 행사를 치르면서 전시장 운영 방식이 크게 개선이 됐던 것이다. 지난해보다 심사를 깐깐히 해 참여 화랑수를 185개 전후에서 170개 정도로 줄였고, 부스 크기는 키웠으며, 부스 사이의 통로를 널찍하게 했다. 예전처럼 작품 밑에 작가의 이름을 큼직하게 붙여 놓아 ‘장사치 같은 행태’를 보이던 화랑도 솎아냈다.

물론, 키아프의 쾌적한 고품격 분위기는 더 없이 좋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취재기자로서 키아프를 찾을 때의 이야기다. 500만원의 구매 예산을 염두에 두니 키아프도 달라보였다. 월급쟁이 컬렉터인 내가 구매하기엔 작품 가격이 너무 셌다. 더욱이 가격표조차 붙이지 않아 물어보기가 주저될 정도였다.
지난 10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서 관람객들이 부스를 돌며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어포더블 아트페어와 비교하면 부스마다 대작들이 많이 걸려 있다. 화랑협회 제공

A홀 전시장에 들어서니 추첨을 잘 해 맨 앞에 자리잡은 학고재 부스가 눈에 띄었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 ‘피라미드 인터렉티브’는 100만 달러에 나왔다. 이 갤러리 전속 작가인 서용선 작가의 인물 목조각상은 400만원. 페미니스트 대모로 불리는 윤석남 작가의 드로잉도 개당 1800달러. 학고재 전속작가인 겨우 30대 초반인 허수영(32) 작가의 작품도 비록 대작(182븇259㎝)이기는 했지만 2500만원이다. 학고재 우정우 실장은 오세열 작가의 150호 작품이 9000만원에 판매 완료됐다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현대갤러리에서는 김기린, 김창렬, 정상화, 신성희 등 단색화 및 추상화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들고 나왔고, 동양화로 인물 추상화 작품을 하는 서세옥 작가의 작품도 있었다. 서세옥 화백의 작품도 100호가 2억원이라고. 부산의 데이트 갤러리는 요즘 값이 비싼 단색화 작가의 작품을 대거 들고 나왔는데, 영어를 할 줄 아는 알바생까지 따로 고용했다. 올해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미술주간을 정해 외국의 유수 컬렉터를 대거 초청해 판매를 기대했던 것이다.
지난 10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16 KIAF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이 부스를 돌며 작품을 구경하고 있다. 부스 사이의 복도를 예년보다 넓게 해 쾌적한 느낌을 준다. 화랑협회 제공

그나마 내 예산 범위에 드는 것은 동산방 화랑에 나온 서용선 작가의 10호 짜리 드로잉 (300만원)이었다.그러나 유화가 아니라 드로잉이다. 이런 내 사정을 듣고 잘 아는 화랑 직원은 다른 화랑 부스에 나온 중저가 작품에 대해 귀띔해주기도 했다.

이곳에서도 중저가의 작품을 판매하는 갤러리들이 있다. 부스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은 B홀에 몰려있었다. 젊으면서도 유망한 작가들의 작품을 취급하는 화랑들이다. 갤러리 룩스, 갤러리 구, 갤러리 EM, 스케이프, 살롱드에이치 등이 그런 곳이다.
이런 화랑들 부스에 내걸린 작가들의 작품을 유심히 보며 마음에 드는 작가를 찾는 것이 방법일 것이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 만족되지 않는, 꼭 소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나는 그런 작품, 내게 손을 내미는 그 작품을 당장 못 만난다 해도 실망할 건 없다. 내 취향의 작품을 취급하는 화랑 대표와 관계를 트는 계기로 삼고 이후 갤러리로 직접 가면 되니까.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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