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 개인·집단 트라우마 심각…건강한 관계맺기 중요


대기업 컴퓨터개발실에서 근무하는 40대 직장인 K씨는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런데 지난해 진급에 실패한 후 누군가로부터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면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직장동료나 가족들에게 화를 냈고 관계는 점점 나빠졌다. 급기야 지하철을 타면 숨쉬기조차 힘들어 기절할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두려워 최근 한 상담소를 찾았다. 상담을 통해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해 받은 상처가 트라우마가 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진급 실패는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던 무의식의 기억을 건드려 아프게 했던 것이다. 그는 상담소에서 진행하는 ‘자아회복지원그룹’에 참여해 억울한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자존감을 회복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마음의 상처

 ‘트라우마(trauma)’란 특정한 사건으로 생긴 심리적 외상을 의미한다. 사건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K씨처럼 사건이 몸과 마음에 남긴 부정적인 영향을 뜻한다. 그런데 이 트라우마는 아주 충격적인 큰 사건만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에 의해서도 생겨날 수 있다.

 트라우마와 스트레스는 다르다. 스트레스는 일시적이고, 통제 가능하다. 트라우마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도 모르는 순간에 덮쳐올 수 있기에 통제가 불가능하고, 평생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시험을 잘 치러야 하는데’라고 느낀다면, 그건 스트레스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시험 운이 없다’ ‘나는 무슨 시험을 봐도 합격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건 트라우마에 가깝다.

 전문가들은 어린 시절 가정폭력에 노출됐던 사람은 성인이 된 후에도 타인과 안정적이고 신뢰관계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현재와 미래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트라우마가 된다는 것이다.

 고병인 가족상담연구소장은 “상담자들 중에 가정폭력으로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낮은 자존감을 가질 수밖에 없고 아주 사소한 자극에도 매우 취약하다”고 했다. 이어 “트라우마는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누적된 감정이 묻지마 범죄, 분노조절장애 등의 병리적 증상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고 소장은 “치유그룹이나 공동체에서 ‘난 할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존감을 키우고 건강한 관계를 맺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라고 제안했다.

 한국인 100명 중 1명이 공포장애

 불안장애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사람이 한 해 50만 명에 달한다. 국민 100명 가운데 1명은 불안증세로 사회생활에 지장을 받고 있는 셈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최근 의료통계정보시스템에 따르면, 공포장애(질병코드 F41)로 병원을 찾은 사람은 2011년 44만4995명에서 2015년 52만2365명으로 17.4% 증가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한국인은 전 국민이 신경쇠약에 걸리기 직전의 상태로 보인다. 급격한 경제성장에 따른 물질주의와 극도의 경쟁이 스트레스를 야기하고 있다”고 보도하기까지 했다.

 트라우마는 당사자 뿐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까지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남편이 트라우마로 고통 받으면 아내도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향이 있고,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신감이 부족하고 불안해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은 똑같은 사건을 겪어도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 이 다르다고 말한다. 충격적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80%는 6개월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자연회복을 하는데 20%는 외부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럼 어떤 사람이 80%에 해당할까. 기질의 차이도 있지만 내안에 ‘긍정적인 자원’이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내적자원이란 힘들 때 자신을 돌봐줄 대상을 의미한다. 부모와 안정적인 애착관계가 유지되는 경우 회복의 정도는 빠르다. 부모가 없을 경우 부모를 대신하는 제2의 양육자가 내적자원이다.

 또 아픔을 나눌 수 있는 가정·교회·지역공동체가 내적 자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서로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 하나님을 치유의 중심에 두는 공동체를 만나는 것이다. 집단원들이 자신의 아픈 상처를 내어 놓고 치유를 받는 공통된 경험을 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강렬한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 교회나 기독교상담기관이 운영하는 소그룹모임이나 영성수련회 등에 참여해 건강한 관계를 맺는 연습이 우선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공부

 그동안 현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세계에만 익숙해,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마음 돌보는 것을 게을리 했다. 지금은 자신의 내면을 돌보고 잠재력을 개발해야 한다.

 ‘5·18 민주화운동’ 생존자들의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 ‘그룹 투사 꿈 작업’을 하고 있는 고혜경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 대형 트라우마 사건이 많았다. 그럼에도 마음 안의 일은 개인의 몫으로 그냥 견디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은 상처들이 누적되면 사회적 병리현상은 깊어진다”며 “우리 신경계는 ‘그날 그 순간 그 자리’에 고착돼 있다. 몸 안의 신경계는 그 날은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고 교수는 현대사회의 트라우마는 개인에게 국한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대형사고, 자연재해, 테러와 전쟁 등 집단적인 트라우마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 그는 “토요일마다 이어지고 있는 촛불집회는 국민들이 건강한 분노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 ‘위대한 집단상담’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개혁과 변화의 주인공이 됐던 그 기억의 힘이 우리 사회를 긍정적으로 이끌어갈 정신적 자원이 될 것이란 말이다.

이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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