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참내기도 좋으면 선뜻 사줬던 미국인 컬렉터

지하 전시장으로 내려가는 좁은 계단에 서서 작가를 인터뷰했다. 서울 서촌의 대안공간 ‘사루비아다방’은 옛날식 건물 지하에 들어서서 그런지 장소가 다소 옹색했다. 그날따라 전시장에선 관객과 큐레이터의 만남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마땅한 공간이 없는 탓에 우린 계단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구지윤 작. '비밀 소문 거짓말' 캔버스에 마커 펜과 유채, 2016년. 작가 제공

지난해 가을이다. 사루비아다방에서 개인전 ‘무거운 농담’전을 가진 구지윤 작가를 만났다. 꿈과 현실 사이에 위태롭게 서 있다 가장 붓을 꺾기 싶다는 35세를 코앞에 둔 나이의 그녀는 아직 앳되어 보였다. 그러나 진지했고, 결기마저 표정에 묻어났다. ‘무거운 농담’이라?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뒤집기 한 듯한 전시 제목이 흥미롭다. 사회에 농담을 던지지만 결코 가벼워질 수 없는 현실, 그런 현실을 바라보는 심리적 풍경이 전시장 안에 펼쳐져 있다. 그녀는 요즘 작가로는 드물게 회화를 하는데, 거기 붙은 제목이 눈길을 끈다. 구경꾼, 껌 지렁이 먼지, 비밀 소문 거짓말, 침착한 태도…. 이런 흥미로운 작품 제목들은 작업할 때 썼던 메모에서 무작위로 가져온 것들이다. 다다이즘 작가를 연상시키는 작가적 행위다. 과감하고 빠른 붓질, 블루가 배어 있는 어두운 색상, 거기서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표면의 작품 이면에는 그녀의 회화의 출발인 공사장 이미지가 뭉개져 있거나 숨어 있다. 아침까지도 보던 건물이 저녁에 부수어지고, 분주히 공사 차량이 오가며 철골 구조가 쑥쑥 올라가더니 어느 날 멀쑥하게 생긴 새 건물이 들어 서 있는. 도시의 공사장 풍경 속에서 그녀의 유년과 청춘이 갔다. 그녀가 나고 자란 서울 뿐 아니라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떠난 메트로폴리탄 뉴욕에서도 익숙하게 본 거리 풍경의 아이콘이다. 수십년 세월이 흐르며 기술의 발전과 함께 공사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속도에서 오는 불안을 그리고 싶었어요. 예측이 불가능해진 시대, 우리는 늘 어떤 미묘한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아요. 특히 대도시에선….”

이번 작품에 대해 사루비아다방 이관훈 큐레이터는 이렇게 쓰고 있다.
“작가는 사실적인 형상을 걷어내고 마치 구축과 파괴의 프로세스가 쉴 틈 없이 이뤄지는 복잡한 공사 현장처럼, 다양한 조형 요소들이 서로 뒤엉키고 생성, 소멸하기를 반복하는, 일종의 기형적이면서 추상적인 형태를 취한다. 또한 이것은 거대한 크기의 캔버스 화면 안에서 화면 곳곳을 날카롭고 과감하게 가로지르는 붓질을 통해 형상화된다.”
사루비아다방에서 지난해 11월 가진 구지윤 개인전 '무거운 농담' 설치 전경. 작가 제공

구지윤은 불안과 불확실성이 스모그처럼 깔려 있는, 오늘의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내면을 공사장 풍경에서 포착해 내고 있는 것이다.
구지윤은 한국과 뉴욕에서 겨우 몇 차례 개인전과 단체전을 한 신인 작가다. 한국의 컬렉터들 가운데 이런 샛별에 주목할 이가 얼마나 될까. 그에게는 놀랍고도 신기한 판매 경험이 있다. 아쉽게도 뉴욕에서다. 뉴욕대(NYU)에서 석사학위를 막 끝낸 2010년, 두산갤러리 뉴욕지점에서 기획한 3인전 ‘미묘한 불안’에 초청됐다. 생애 첫 전시다. ‘공사장 풍경’을 처음 시도했던 전시이기도 하다.

“글쎄, 제 그림을 사는 분이 계셨어요. 졸업하고 첫 전시인데, 이름 없는 아시아 작가 인데, 작품 활동을 계속할지도 모르는 작가인데 말이죠. 그것도 2점이나 사셨어요. 내 그림이 팔리기도 하구나 싶으니 신기하더라고요.”
완전 새내기 작가인데도, 마음에 들면 선뜻 지갑을 여는 미국의 컬렉터 문화에 고마움이 와락 느껴졌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작품을 살 때 컬렉터의 취향이 중요한 것 같아요. 미래에 오를까? 투자 가치를 따지기보다, 자신의 마음에 들면 경제적인 여유 안에서 신인이건, 기성작가 건 개의치 않는 것 같더라고요.”

# '눈이 아니라 귀로 산다'는 한국 컬렉터

한국의 컬렉터 문화는 뉴욕과 많이 다르다. 한국에서는 유명한 작가라야 일단 안심을 한다. 하다못해 작가 앞에 교수 타이틀이 붙으면 더 안심하고 산다.

그래서 구지윤 작가 같은 신진들이 미술 작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어 중견 작가의 반열에 올라 전업 작가로 살수 있기까지 그들은 다른 일을 해서 먹고 산다. 가장 선호되는 게 미술 학원 강사, 대학원 강사 등 가르치는 일이다. 유치원 등 아동미술 강사도 한다. 그러다 힘들면 포기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대학원 다닐 때만 해도 주변에 아는 작가 가운데 누가 작품이 팔렸다는 소리를 들으면 불안했어요. 하지만 짧게 보면 내 작품이 소비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이제는 팔리든 팔리지 않든 길게 내다보며 작업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팔리지 않는데도 작업을 계속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자기와의 싸움일까. 오늘은 ‘포기하자’고 했다가 내일은 ‘그래도 다시 한번’하는 작가들을 후원하는 한국이 컬렉션 문화는 요원할까.
“한국의 컬렉터는 눈으로 사는 게 아니라 귀로 산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판단보다는 남의 이목, 남의 평가에 더 신경쓰다보니 결국은 유명 작가, 이미 알려진 작가의 작품 위주로 구매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신진 작가들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프랑스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는 사진작가 염중호(52)씨는 서구와 한국의 컬렉터 문화의 차이를 누구보다도 피부로 느낀다. 지난해 가을 서울 종로구 삼청로 원앤제이갤러리에서 개인전 ‘괴물의 돌’전을 가졌을 때 그를 만났다.

사진 설치 영상을 내놓았는데, 관통하는 주제는 ‘돌의 인문학’이다. 아마추어 수석 수집가들의 수석전(展) 전시 서문을 패러디한 문장을 돌가루로 써서 붙여 놓은 것도 있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화랑 시절 고된 수련 끝에 바위를 깼다는 영웅 만들기 신화를 비웃는 영상, 서민 연립 주택의 난간에 쓰였다가 버려진 그리스의 도리아식 기둥의 복제품이 보여주는 서구 콤플렉스 등 돌에 투사된 한국인의 욕망을 보여준다.
염중호, '괴물의 돌'. 피그먼트 프린트 사진. 2011년 . 원앤제이갤러리 제공

염중호 작가는 한국 뿐 아니라 일본 대만 프랑스 등지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을 여러 차례 하며 이름을 알린 작가이다. 2007년부터 프랑스를 무대로 활동해온 그에게 프랑스의 컬렉션 문화에 대해서 물어봤다. 그는 한국인의 ‘회화 편식’을 지적한다.

“한국 사람은 유난히 회화를 좋아합니다. 풍경화나 꽃 그림, 밝은 그림, 팝 아트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지요. 컬렉션 초보 단계에서는 그럴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컬렉션 스타일이 발전하는 게 좋지요.” 

염 작가는 유럽의 컬렉터들은 사진이나 조각 작품은 물론 영상이나 설치작품 등을 구매하는 컬렉터들을 알고 있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미술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 아트페어가 아니라 비엔날레를 자주 보러 다니는 이들도 많다.

미술사를 전공하고 네덜란드에서 10여 년 간 생활한 바 있는 양정윤 네덜란드교육진흥원장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네덜란드에선 웬만한 중산층, 정말 보통의 가정에서도 매년 한 점씩 작품을 사는 걸 봤다”면서 “그런데 마구잡이로 사는 게 아니라 올해의 주제는 뭐다, 하는 식으로 켈렉션 구상을 미리하고 작품을 구매하는 걸 보고 많이 놀랐다”고 했다. 구매를 염두에 두고 전시 관람하면 훨씬 재미있어지고 관전 포인트도 달라진다고.

현대미술에서 회화야말로 마이너 장르로 밀려나고 있고 이는 유럽 컬렉터들의 컬렉션 구성에서도 드러난다는 게 양 원장의 얘기다. 또 어떤 컬렉터들은 후원의 개념으로 컬렉션을 하기도 한다. 갓 대학을 졸업한 신진 작가들 중 우수한 ‘병아리 작가들’을 선발해서 제작비 일체를 지원해주고 작품을 컬렉션하는 경우도 있다. 대개는 설치나 영상 작품이다.
양혜규 작가가 자신의 여러 작품을 포장해 내놓은 ‘창고 피스’. 2004년 제작됐던 이 작품은 여러 도시에서 전시되다 2007년 독일 베를린의 한 갤러리에서 ‘창고 피스 풀기’ 퍼포먼스를 통해 포장 안의 작품이 공개되기도 했다. 삼성미술관 리움 제공

이제는 국제무대에서 스타가 된 설치미술가 양혜규(46)씨. 그에게도 추운 무명 작가시절이이 있었다. 작가에게 작품은 팔리지 않은 이상 짐이 된다. 독일 베를린을 무대로 뛰던 30대 중반의 그에게는 더욱 그랬다. 궁여지책으로 팔지 못한 작품 23점을 운송업체에서 포장한 그대로 묶어서 ‘신작’이라고 베를린의 화랑에 내놨다. ‘창고 피스’(2004)라 제목을 붙인 그 작품을 사 준 것은 독일의 컬렉터였다.  

한국의 현대미술사에서도 회화를 벗어나 퍼포먼스, 설치 등 실험미술이 등장한 것은 이미 1970년대부터다. 1990년대 들어서는 장르의 융합과 경계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수입되면서 작가들의 작품도 영상, 설치, 퍼포먼스 작품 등으로 보편화됐다. 그럼에도 컬렉션에서는 회화에 대한 애호가 ‘철옹성’ 같다. 이런 보수적인 컬렉션 경향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컬렉션 문화가 작용한 탓이 아닐까.

# 컬렉터가 미술시장을 만들어가기도

유럽에서는 컬렉터 파워도 대단하다. 한국에서는 갤러리가 작가를 키우지만, 프랑스에서는 컬렉터가 작가를 키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염 작가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제가 아는 컬렉터 중에는 자신이 작품을 구입한 신진 작가가 더 좋은 작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후원을 한다. 단순히 작품을 사 주는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작가의 작품이 좀더 좋은 국립미술관의 컬렉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위원회에 작가를 추천을 한다거나 갤러리에 작가를 추천해 아트페어에 보내기도 합니다.”

이런 컬렉션 행위들은 매우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지속되는데 그 이면에는 자신의 안목을 증명하고 싶은 욕구가 숨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에게는 그냥 작품을 팔았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팔았느냐가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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