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골 컬렉터에게 작품 '못질 서비스'는 기본


서울대 미대에서 실기를 전공한 Y씨. 그녀는 졸업 후 주요 화랑인 A화랑에서 일한 적 있다. ‘S대 출신’ 재녀인데다 미모도 출중했다. A화랑 대표는 작품을 구입한 컬렉터의 집에 그림을 설치해 주러 갈 때 굳이 그녀를 데리고 갔다.

“사모님, 저희 Y씨, S대 나온 거 아시죠? 근데도 요즘 애들 같지 않게 참 참해요. 좋은 남자 있으면 중매 좀 해주셔요. 호호.”
이미 약혼까지 한 Y씨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화랑 대표는 컬렉터와의 ‘원만한’ 대화를 위해 Y씨를 소재로 끌어들인 것이다.

화랑들이 컬렉터 ‘모시는’ 정성은 놀랍다. B화랑 대표가 전해주는 얘기는 그런 속사정의 일단을 보여준다. “큰 컬렉터라면 제 경우엔 여름에는 꼭 전복 선물을 챙겨요. 작품을 산 님 집에는 어지간하면 직접 따라갑니다. 같은 작품이라도 어디에 거는 가가 아주 중요하거든요.”

‘소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하듯이 미술 작품도 한 번 산 사람이 계속 산다. ‘강소 화랑’인 C화랑 대표는 “1년에 5억 원씩 작품 사주는 컬렉터 3명만 있어도 화랑은 굴러간다”고 털어놓았다. 컬렉터 층의 확장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집토끼 관리’야말로 화랑이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된다.

이런 이유로 컬렉터의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갤러리에서 컬렉터 대상 미술 교육을 제공하기도 한다. 국내 최대 갤러리인 국제갤러리는 소수 정예 컬렉터를 대상으로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옥션은 기업 CEO를 대상으로 조찬강연 프로그램인 ‘아트앤컬처’를 시행하고 있다. 또 미술교육 입문자를 대상으로 한 ‘문화예찬’ 프로그램을 통해 신규 컬렉터 양성을 시도하고 있다.

# 진짜 컬렉터는 ‘미술 호텔’에 작품 맡긴다
서울옥션 직원이 지난 15일 경기도 양주 장흥수장고의 11평짜리 개인별 보관고에서 작품 상태를 살피고 있다. 익명의 고객이 취재에 협조해 공개했다. 아래 왼쪽 사진은 개인별 보관고에 들어가기 전 먼저 통과해야 하는 1차 관문으로 엘보 다이얼이 설치돼 있다. 오른쪽은 여유롭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마련된 VIP룸. 이동희 기자

일반인은 모르는 컬렉터의 세계는 또 있다. ‘그림 호텔’ 얘기다.
“손 기자는 그림 안 사나요?” “에고, 저희는 거실이 서재라 그림 걸 공간이 없는 걸요.”
수도권 신도시에서 병원장을 하는 컬렉터 A씨. 나는 그가 옥션에서 근대기 대표 작가인 도상봉의 정물화를 2억원에 낙찰 받는 걸 본 적이 있다.
‘월급쟁이 사는 게 빤한 걸 알면서….’
자격지심 탓에 질문이 짓궂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이 좁다는 말로 눙쳤다. 그런데 이렇게 ‘펀치’를 날리지 뭔가.
“에이, 손 기자. 요새 누가 집에 거나요. 수장고에 맡기지. 보고 싶을 때 가서 얼마든지 보면 되는데….”

이른바 ‘그림 호텔’에 한 점에 수 천 만 원에서 수 억 원하는 그림을 맡긴다는 컬렉터들의 세계가 궁금했다. 서울옥션이 운영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의 미술품 수장고를 취재했다.미술품 수장고 서비스는 금융권의 귀중품 보관 서비스와 비슷하다. 때로는 보석 보다 더 비싼, 그러면서 성질은 더 ‘까칠한’ 미술품을 안전하게 보관해주는 곳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 내리니 육중한 철문이 버티고 있다. 직원이 큼지막한 엘보 다이얼을 돌렸다. 천천히 열리는 문이 열리는데, 그 너머로 복도를 따라 호텔처럼 룸이 이어져 있는 게 보였다. ‘A203호’. 별도 비밀번호를 눌러야 문이 열리는 방에 들어서니 천장이 3.5m로 유난히 높은 게 먼저 눈에 띄었다. 가변형 선반에는 여러 크기 그림들이 포장된 채 차곡차곡 수납돼 있었다. 36㎡(11평) 공간을 채운 그림은 얼추 200여점 되어 보였다. 100호(130×160㎝), 200호(193×259㎝) 대형 작품도 적지 않았다. 시가로 따지면 수십억∼수백원어치의 그림이 있는 비밀의 방에 들어왔다는 기분에 묘한 흥분감이 일었다.

겉포장에 붙은 태그에는 번호, 작가명, 작품명, 크기, 구입 연도 등이 적혀 있었다. 이곳은 항온·항습(온도 20도, 습도 50% 내외)은 기본이다. 사람이 아니라 그림에 온습도를 맞춘 탓인지 약간 한기가 느껴졌다. 최신식 하론가스 소화시설도 있었다. 화재가 났을 때 불을 끈 뒤에도 약품의 잔재물이 남지 않아 박물관에서 선호하는 소화기이다.

느긋하게 감상하고 싶을 때는 그림을 꺼내 응접실 분위기가 나는 ‘VIP룸’으로 간다. VIP룸에서 여유 있게 차를 마시며 지인들에게 그림 자랑을 하는 이도 있다. 작품 거래가 이뤄지기도 한다. 서울옥션 김경순 팀장은 “아침에도 고객 한 분이 다녀갔다”며 ‘원하면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음을 강조했다.

장흥 수장고엔 그날 구경한 것보다 규모가 더 큰 49㎡(15평), 69㎡(21평) 짜리 수장고도 있다. 21평이라면 신혼 때 사는 아파트 평형대다. 그런 엄청난 규모의 공간이 오로지 작품을 보관하기 위한 수장고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서울옥션은 서울 도심인 인사동(1평)과 평창동(6평)에 규모가 작은 수장고도 운영하고 있다. 이들 수장고의 연간 임대료는 연 400만∼2700만원. 월급쟁이 처지로서는 꿈도 꾸기 힘든 지출이다.

K옥션도 서울 강남 본사에 미술품 수장고를 소규모로 운영하고 있다. 개인별 공간을 세주는 게 아니라 작품별로 보관해주며 크기에 따라 개당 보관료를 받는다.

이용료가 적지 않은 금액인데도 컬렉터들이 ‘출혈’을 감수하는 건 집이나 사무실에 걸 수 있는 규모보다 작품을 더 많이 산 때문일 것이다. 작품 훼손 우려 없이 잘 보관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이곳을 이용하는 컬렉터 A씨는 “거실에 걸기엔 큰 100호 이상 대작이나 작품성은 있지만 보고 있으면 우울해지거나 무시무시한 느낌이 드는 그림은 수장고에 맡기게 된다”고 했다. 개인 고객의 경우 미술관 건립을 염두에 두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규모가 큰 장흥 수장고는 기업 고객이 많이 찾는다. CEO가 미술애호가인 중소기업이나 계절별로 그림 교체 필요가 있는 호텔에서도 즐겨 이용한다. 수장 공간이 부족한 작은 갤러리도 단골 고객이다. 인사동 수장고의 경우 월 단위로 빌릴 수 있는 이점이 있어 지방 출신 화가들이 서울에서 전시할 때 요긴하게 쓰기도 한다.

# 컬렉터, 돈이 아니라 공부가 살 길이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컬렉터들은 확실히 딴나라에 사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컬렉터를 위한 변명을 하고 싶다. 필수품도 아닌 미술품을 사는 그들은 대단하다. 자금력이 뒷받침돼야 하지만 그것이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을 구입하는 일은 냉장고, TV를 사는 것과 다르다. 미술품 구입이야 말로 가장 지적인 취미이기 때문에 어느 수준에 올라서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컬렉터는 말했다.

“미술은 대학에 과가 정해진 학문 분과가 아닌가요. 미술품 수집은 공부를 해야 안목이 생겨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주식투자만 해도 고수들은 기업의 투자 내용, 주가 추이 분석도 하지 않고, 유명하다고 해서 그 회사 주식을 사거나 하지는 않잖아요.”

컬렉션을 하면서 다시 공부하는 이들을 많이 보아왔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를 읽고, ‘1960년대 이후 미국 미술사’, ‘한국 미술사’ ‘중국 미술사’ 등 동서양 미술사를 읽고 뼈대를 갖추면 작품을 보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미술 관련 서적과 잡지 등을 보는 것에서 나아가 미술관, 갤러리에서 운영하는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심지어 대학원에 진학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김홍도의 '마상청앵도'. 그림 옆에 쓴 제발(글) 끝에 '단원(檀園)이 썼다라고 표시돼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사실 그 병원장 컬렉터 A씨는 컬렉션을 하다 내친김에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를 공부한 사람이다. 그 대학원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옥션 투어를 한 적이 있다. 김홍도의 서화 앞에서 그가 말했다. ‘단원’이라는 낙관이 있는 그림이었다.

“교수님, 김홍도는 단원(檀園)이라는 호를 40대 초반 이후에 썼는데, 이 그림이 그 때 화풍과 비교해 어떤가요?”

한국미술사를 웬만큼 공부하지 않고서는 던질 수 없는 질문, 이 정도면 진위까지 따져볼 수 있는 역량이다. 중인 신분인 화원 화가 김홍도는 정조의 귀여움을 받아 43세에 경상도 안동의 안기찰방을 지냈다. 이후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서 단원(檀園)이라 스스로 칭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계층 상승에 대한 열망은 호에 투사됐고, 그림 세계에도 문인화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컬렉터들의 길은 화려해보이지만 부단히 공부해야 하는 길이다. 화교 출신인 인도네시아 축산가공업재벌인 부디 텍(중국명 위더야오·余德耀·60). 양계사업가에서 출발해 세계적 컬렉터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500점이 넘는 방대한 소장품을 자랑한다. 그는 독일 표현주의 작가 안젤름 키퍼,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같은 거장 뿐 아니라 장 샤오강, 아이 웨이웨이, 팡 리준 등 중국 현대미술 작가 작품을 집중적으로 사들여 중국 미술을 세계 미술의 중심에 끌어올렸다. 2011년 미국잡지 ‘아트+옥션’이 선정한 ‘세계 10대 컬렉터’에 아시아인 최초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소장 리스트에는 한국 작가로는 단색화 작가 박서보 같은 노장 뿐 아니라 서도호, 최우람 같은 중견 작가도 있다. 2016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코리아 갤러리 위켄드’(13∼16일) 참석차 방한해 한국 기자들과 만났을 때 나는 다른 어떤 말보다 이 말이 생생하게 남는다.

“2004년부터 현대미술 컬렉션을 했으니 긴 여행을 해 온 셈이네요. 그 사연은 2, 3시간 얘기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컬렉터로 사는 일은 어떤 일보다 노고가 필요한 일입니다. 저는 남들이 발견하지 않은, 새로운 작품을 , 그것이 역사에 오래 남을 작품을 사 모으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작품에 눈길을 먼저 주고 과감하게 수집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컬렉터야말로 백조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유유히 우아한 자태를 뽐내지만 그들로 수면 아래서는 부단히 헤엄을 치고 있는 것이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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