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109> 미스터 빈, 매그레가 되다 기사의 사진
매그레 경감역을 맡은 '로완 앳킨슨'
놀라웠다. 벨기에 작가 조르주 심농이 창조한 쥘 매그레 경감을 연기하는 ‘미스터 빈’ 로완 앳킨슨을 보는 느낌은. ‘매그레, 덫을 놓다(Maigret Sets a Trap)’. 지난해 영국의 ITV가 방영한 이 드라마는 코미디언 앳킨슨을 ‘핑크 팬더’의 클루소 경감 같은 웃음거리 형사가 아니라 과묵하고 진지한 프랑스의 경찰관으로 기용했다. 얼굴만 봐도 웃음이 터지는 이 사나이는 그러나 진지하다 못해 때로 우울하고 슬프기까지 한 모습의 매그레를 멋지게 소화해냈다. 다소 과장하자면 매그레 역할로는 그 이상 가는 배우가 없다는 장 가뱅에 비견될 만큼.

좋은 추리영화가 없나 인터넷을 뒤지던 중 이 영화를 발견했다. 비록 극장용이 아니고 TV영화였지만 훌륭한 추리, 탐정영화에 목말라하던 차에 얼른 받아봤다. 매그레가 누군가. 셜록 홈즈니 엘러리 퀸이니 필립 말로 등 영미(英美)계 명탐정들이 판치는 추리소설계의 희귀한 프랑스 명탐정으로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캐릭터 아닌가(물론 애거서 크리스티가 만들어낸 벨기에 출신의 불어권 탐정 에르퀼르 포와로가 있지만 포와로는 영어를 사용하면서 영미권에서 주로 활동한 만큼 영미권 탐정으로 분류하는 게 옳다). 더욱이 세상에, 그 매그레를 ‘웃기는 사나이’ 로완 앳킨슨이 연기했다니. 하지만 그에 대한 관람평은 앞서 말한대로다. 단지 애쉴리 피어스라는 감독이 연출한 영화 자체는 그저 그런 정도였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로케이션으로 대부분 촬영했다는 거리 모습이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인 1950년대의 파리 분위기를 전달하는데 모자람이 없었다는 점만 빼고는.

새삼스레 소개하는 것이 겸연쩍지만 매그레 경감은 추리소설 쪽에서는 전설이다. 심농이 1931년부터 1972년까지 쓴 장편 75편, 단편 28편의 소설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매그레 경감은 파리 경찰로 무뚝뚝하고 인내심이 많은 거구의 중년 사나이다. 그는 ‘추리기계’라 할만한 홈즈나 포와로 같은 천재형 탐정도 아니고 더쉴 해밋의 샘 스페이드나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처럼 냉혹하고 하드보일드한 터프가이형 탐정도 아니다. 평범한 경찰관으로서 타고난 인내력을 바탕으로 꾸준히 발로 뛰는 수사를 통해 범인을 찾아내는 대단히 인간적인 탐정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한국의 TV 속 ‘수사반장’과 흡사하다고 할까.

이처럼 평범함 속의 비범함으로 명탐정 대열에 뛰어오른 매그레는 엄청난 인기를 끌어 한국어를 포함해 전 세계의 주요 언어로 번역서들이 나왔다. 아울러 영화와 라디오, TV로도 만들어졌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전세계에서 제작된 매그레 영화(TV물 포함)는 171편이나 된다.

우선 영화는 일찍이 1932년에 명장 장 르누아르가 첫 번째 매그레 영화(‘교차로의 밤’, La Nuit du Carrefour)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여러 배우가 매그레 역을 맡았으나 프랑스 배우 중에서는 1958, 1959, 1963년에 매그레를 연기한 장 가뱅이 가장 유명하다. 실제로 매그레의 이미지에 그처럼 딱 들어맞는 배우도 드물다. 특히 가뱅의 58년작 ‘매그레 경감(장 들라누아)’은 앳킨슨 영화와 원작이 같다. 그런 만큼 두 영화를 비교해서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또 비록 프랑스 경찰이지만 영국에서도 매그레 영화가 여러편 나왔다. 매그레 역을 맡은 최초의 영어권 배우는 명우 찰스 로튼(‘에펠탑의 사나이’, The Man on the Eiffel Tower, 버제스 메레디스, 1950)이었고 이후 리처드 해리스는 TV영화에 매그레로 등장했다. 이밖에 TV물로는 프랑스에서 가장 훌륭한 매그레 중 한사람으로 꼽히는 브루노 크레머가 주연한 드라마(1991~2005)가 있고, 영국에서는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덤블도어 교수 역을 했던 마이클 갬본경(卿)표 매그레 시리즈(1992~93)가 유명하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매그레가 TV에 등장했다. 아일랜드,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러시아 등. 심지어 일본까지 매그레를 일본판으로 번안해 방영했다. 원작자 심농은 그중 영국에서 갬본에 앞서 1960년대에 매그레를 연기했던 루퍼트 데이비스와 이탈리아 TV에서 1964년부터 1972년까지 매그레 역할로 나온 지노 세르비가 가장 매그레 같은 ‘완벽한 매그레’라고 평했다(재미있는 것은 심농이 매그레 소설과 영화에 고정적으로 출연하는 인물 중 하나인 매그레 부인역 가운데 최고로 일본배우를 꼽은 것이다. 일본에서는 1978년 현대 일본으로 배경을 옮겨 도쿄 경시청 소속 ‘메구레 경감’ 드라마가 방영됐는데 부인역은 이치하라 에쓰코가 맡았다).

이런 배우들의 대열에 로완 앳킨슨이 끼어든 것이다. 앳킨슨은 뭐니 뭐니 해도 ‘미스터 빈’으로 기억되는 코미디배우다. 왕방울 같은 눈과 커다란 코, 짙은 눈썹, 빠른 하관의 우스꽝스런 얼굴에 한껏 무게 잡고 내리깐 저음으로 말하다가 급하거나 당황하면 더듬는 말투, 거기에 슬랩스틱한 몸짓까지 영국을 넘어 세계적인 코미디언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으면서도 진지한 정극연기, 그것도 매그레 경감 역에 도전한 앳킨슨은 정녕 의외의 인물이다.

우선 학력. 그는 뉴캐슬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후 옥스퍼드대 퀸즈 칼리지에서 같은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코미디언이 처음부터 따로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어쩐지 의외다. 코미디와는 잘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미스터 빈으로 출세했으면서도 그는 2012년 미스터 빈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미스터 빈은 몸개그 위주로 어린애 같은 유머를 구사하는 인물이지만 자신은 나이 50이 넘어(그는 1955년생이다) 체력에 한계를 느꼈을 뿐 아니라 어린애처럼 구는 데 비애를 느낀다는 것이었다. 그래선지 이제 아예 코미디와는 손을 끊은 것인가. 매그레 역할을 멋지게 해낸 그가 앞으로 또 어떤 역할, 연기에 도전할지 알 수 없으나 매그레 TV시리즈가 올해 안으로 3편 더 나올 것이라고 한다. 참으로 기대된다.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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