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110> 도덕적 딜레마 성찰하기 기사의 사진
‘패신저’의 포스터. 제목 아래 기호는 모르스 부호로 SOS의 뜻.
“무엇이 옳은가?”-- 누구나 살면서 겪게 마련인 도덕적 딜레마가 가슴을 파고드는 영화를 봤다. ‘패신저(Passengers, 모튼 틸덤, 2016).’ 출연자라고는 단 다섯 명. 그것도 하나는 제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앤드로이드 역할이고 한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금세 죽는다. 또 한 사람은 대사 한마디 없이 단 15초 동안만 화면에 나온다. 그러니까 영화는 실질적으로 두 사람이 이끌어간다. 하지만 참으로 묵직한 도덕적인 질문을 던진다.

공간적 배경은 우주식민지 행성을 향해 광속의 절반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 5000명의 승객과 250여명의 승무원이 동면상태로 타고 있다. 목적지까지 우주선 시간으로 120년이 걸리는 여행인 만큼 불가피한 방식이다. 그런데 앞으로 90년쯤 더 가야 할 시점에서 동면기계의 고장으로 한 남자(크리스 프랫)가 깨어난다. 원래대로라면 도착 몇 달 전에 깨어나야 하는 것이었음에도.

1년 이상 혼자 지내면서 넓고 안락하지만 꽉 막힌 우주선에서 혼자 외롭게 살다가 죽어가야 할 운명에 절망한 남자는 자살까지 시도하다 동면중인 한 아름다운 여자(제니퍼 로렌스)를 본다. 남자는 여자에 대한 사항을 조사하면서, 특히 여자가 작가라는 것을 알고는 그가 쓴 글을 모두 찾아 읽어보면서 여자에 대해 알아간다. 여자에게 흠뻑 빠진 남자는 고민한다. 여자를 깨울 것인가, 말 것인가. 깨우면 여자도 자기와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고 이는 여자의 인생을 빼앗는 셈이 된다. 하지만 여자를 깨우지 않고 혼자 살아가기에는 자신의 삶이 너무 외롭고 처절하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남자는 여자를 깨운다. 여자는 자신도 기계고장으로 깨어난 줄 알고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던 중 앤드로이드 바텐더가 여자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 저 남자가 당신을 깨웠다고. 여자는 분노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이번엔 여자에게 닥친 딜레마다. 남자가 다시 동면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으나 오직 한사람만 가능하다며 여자에게 원하면 다시 동면하게 해줄 수 있다고 제안한 것. 자, 어떻게 할 것인가. 혼자만 동면에 들어감으로써 한때 사랑했던 남자를 홀로 남겨둘 것인가. 외롭겠지만 인간세계와 동떨어져 남자와 남은 생을 같이 할 것인가. 아니 사랑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인간적 측면에서 혼자만 자기 인생을 찾겠다고 동면에 들어가는 게 옳은가.

두 사람의 선택 모두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과연 나였다면 어땠을까. 감독은 “같은 경우에 처했다면 우리 모두는 주인공들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했다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의문도 들었다. 남자는 실용적인 기술자에 용감한 미남이고 여자는 명석한 미녀다. 그렇지 않았다면 주인공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 같은 딜레마를 더 파고들었다면 영화는 좀 더 진지한 작품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랬다면 아무래도 재미없는 철학영화가 됐을 게다. 흥행도 염두에 두어야 할 감독은 그 문제를 너무 천착하는 대신 목숨을 걸고 원자로 고장으로 위기에 빠진 우주선을 구하는 남자주인공의 액션을 집어넣었다. 그 탓에 아쉽게도 영화가 다소 산만해졌지만 큰 흠결은 아니다. 당의정이나 롤러코스터 같은 영화들만 판치는 세상에 영화를 보면서 진지한 문제를 성찰할 수 있었으니.

사족--영화는 두 대목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영감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첫째, 동면하다 남자에 의해 깨어난 여자 이름이 오로라다. 그것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이름이다. 둘째, 남자가 깨어난 여자를 데리고 우주유영을 하러 나갈 때 무서워하는 여자에게 말한다. “나를 믿나요(Do you trust me)?” 이 유명한 대사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에서 알라딘이 재스민 공주를 하늘을 나는 마법 양탄자에 태우면서 하는 말이다.

어쨌든 이 영화만 도덕적 딜레마를 다룬 것은 아니다. 아무리 대중적인 매체라지만 영화도 때로는 진지한 주제의식을 갖고 도덕적, 윤리적 딜레마를 다룬 것들은 있게 마련이다.

아주 옛날 것으로 ‘페일세이프(Fail-Safe, 시드니 루멧, 1965)’가 있다. 미국 폭격기가 실수로 소련의 모스크바에 원폭을 투하한다. 바야흐로 3차세계대전이 일어나 인류가 절멸할 지도 모를 판이다. 미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대통령은 고뇌에 찬 결단을 내린다. 사전경고 없이 뉴욕에 원폭을 떨어트리기로. 아무리 수십억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무고한 수백만 뉴욕시민을 희생시켜도 괜찮은 걸까?

그런 거창한 주제 말고 이런 건 어떤가? ‘아이야, 가라(Gone Baby Gone, 벤 애플렉, 2007)’. 소녀 실종사건이 발생한다. 사립탐정들이 고용돼 조사에 들어간다. 알고보니 전직 경찰관이 아이를 좋은 환경과 사랑 속에서 키우고 싶어 데려갔던 것. 소녀는 마약중독자 엄마와 함께 아주 좋지 않은 환경과 사람들 속에서 살고있었다. 자, 아이를 엄마에게 돌려주는 게 옳은가, 그냥 놔두는 게 좋은가?

그런가하면 군대와 전장이라는 극한상황 속에서는 이런 딜레마에 자주 봉착한다. 우선 죽을 위험성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죽을 게 100% 확실한 임무를 조국과 이념을 위해 명령대로 수행하는 게 옳은가, 아닌가(‘갈리폴리’, 피터 위어, 1981)? 아군이 전사하는 치열한 교전 끝에 적군을 포로로 잡았으나 데리고 다닐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자. 붙잡은 적군을 인간적 동정심으로 놓아주어야 하나, 아니면 복수를 위해서, 또는 그가 나중에 아군에게 총부리를 돌리지 못하도록 죽여야 하나(‘라이언 일병 구하기’, 스티븐 스필버그, 1998)?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나? 챔피언전에 나선 여성복서가 잘못 얻어맞아 간신히 의식만 있는 상태의 식물인간이 된다. 앞으로도 여생 동안 회복할 가능성은 없다. 복서는 아버지 같은 트레이너 겸 코치에게 생명유지 장치를 떼어내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한다. 부탁을 들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밀리언 달러 베이비’, 클린트 이스트우드, 2005)?

죄와 벌의 문제도 간단치 않다. 미래를 보는 초능력자들이 범죄를 저지를 것으로 예정된 예비범죄자들을 경찰에 알려줘 검거케 한다.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아직 저지르지 않은, 그래서 일어나지도 않은 범죄의 대가로 벌을 받게 하는 게 정당한가, 아닌가(‘마이너리티 리포트’ 스티븐 스필버그, 2002)? 10살짜리 딸을 강간하고 폭행 살해한 백인 두 사람을 법정 앞에서 쏴 죽인 흑인 아버지를 벌해야 하나? 특히 백인 용의자들이 정당한 재판을 받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타임 투 킬’, 조엘 슈마커, 1996)?

시간이나 죽이려, 오로지 한순간의 재미와 쾌락을 위해 영화를 보지 말고 때로는 영화를 보면서 이런 진지한 문제들도 성찰해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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