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112>암살영화 기사의 사진
‘트로츠키의 암살’ 포스터
김정남 암살사건이 터지고 나서 즉각 떠오른 것은 ‘트로츠키의 암살(The Assassination of Trotsky, 1972)’이라는 영화였다. 북한 김씨 3대의 롤 모델인 소련의 독재자 요셉 스탈린이 최대 정적이었던 레온 트로츠키를 암살한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다. 트로츠키는 ‘붉은 군대(Red Army)’를 창설하는 등 러시아혁명에 큰 공을 세웠으나 스탈린 집권 후 권력투쟁에 밀린 끝에 해외로 망명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멕시코에 정착한 뒤 1940년 그곳에서 스탈린이 파견한 암살자에 의해 등산용 피켈로 살해당했다.

그러나 김정남 살해를 극구 부인하고 있는 김정은, 북한과 달리 스탈린과 소련은 트로츠키 암살이 자신들 짓임을 굳이 숨기려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1940년 멕시코 경찰에 체포된 암살자에게 레닌훈장을 수여했다. 암살자는 또 1961년 수감생활을 마치고 소련으로 귀환했을 때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

할리우드에서 공산주의 활동과 관련해 블랙리스트에 오른 뒤 유럽으로 피신해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던 조셉 로지가 만든 영화는 그러나 영 신통치 않았다. 우선 각본부터가 그랬다. 버나드 울프가 쓴 소설(The Great Prince Died)을 니콜라스 모슬리가 각색한 각본은 얼마나 형편없었던지 당초 로지가 트로츠키역을 제의했던 영국 배우 더크 보가드는 각본을 본 뒤 즉각 배역 제의를 거절했을 정도였다. 결국 로지는 각본을 수정하겠다는 약속을 하고나서 리처드 버튼의 출연 승낙을 받아냈으나 촬영은 각본 수정 없이 진행됐고 그 결과 이 영화는 일부 평론가들에 따르면 ‘사상 최악의 영화’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다음은 캐스팅이다. 트로츠키역의 버튼은 그런대로 봐줄만 하다 해도 암살자역의 알랭 들롱은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들롱은 스타일리시한 암흑가의 암살자로는 멋질지 몰라도 정치적 암살자로는 너무 튄다는 느낌을 주었다. 다 알다시피 실제의 암살자는 생김새건 풍기는 분위기건 아주 평범한 법이다. 그래야 눈에 띄지 않을 테니까. 실제로 본명이 라몬 메르카데르인 스페인 출신의 공산주의자로서 소련 내무인민위원회(NKVD) 요원이었던 트로츠키의 암살자 프랭크 잭슨의 사진을 보면 대단히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영화에 나온 들롱은 어디서든 금방 눈에 띄는 미남인데다 시대배경인 1940년대 복장을 했을망정 스타일 역시 패션모델 같았다.

그렇다보니 잘 된 암살영화로 비록 결과적으로 미수에 그친 사건을 묘사하기는 했지만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 암살음모를 다룬 ‘자칼의 날(The Day of the Jackal, 1973)’이 생각났다. 명장 프레드 진네만이 만든 이 영화는 알제리 독립에 반대하는 극렬주의자들에 의한 드골 살해음모를 다루고 있는데 클래식의 반열에 올라선 프레데릭 포사이스의 원작소설 못지않게 걸작 대접을 받는다. 실제로 영화는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기자 출신답게 디테일 묘사가 일품인 포사이스의 소설을 잘 극화한 것도 그렇거니와 평범한 용모를 지닌, 그때까지 무명이었던 에드워드 폭스를 살인청부업자 자칼로 캐스팅한 것도 성공 이유였다. 진네만 감독은 당초 자칼 역으로 로버트 레드포드, 마이클 케인, 잭 니콜슨, 로저 무어 등 쟁쟁한 배우들이 물망에 올랐으나 모두 거부하고 직업적 살인자로 눈에 잘 안 띄는 아주 평범한 장삼이사(張三李四) 같은 인물을 원한 끝에 잘 알려지지 않은 폭스를 캐스팅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들롱과는 대척점에 서있는 배우라고나 할까.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이 김정남 암살을 두고 ‘권력의 속성’이라고 말해 마치 북한과 김정은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해서 구설에 올랐지만 사실 암살은 인간사의 일부다. 오죽하면 SF의 대가 필립 K 딕은 ‘태양의 복권(Solar Lottery, 1955)'이라는 소설에서 암살이 하나의 제도로 정착된 사회를 그려냈을까. 딕의 첫 출간작인 이 소설은 세계지도자도, 그를 암살해 제거하는 암살자도 추첨으로 뽑는 사회를 묘사한다. 뽑힌 암살자는 어떻게 해서든 지도자를 암살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누구든 추첨을 통해 다시 새 지도자가 되고 또 암살자가 되는 시스템이다.

영화도 일찍부터 암살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다뤘다. 영화 초기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무성영화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 D W 그리피스, 1915)’만 해도 링컨 대통령의 암살을 극화해 남북전쟁을 전후한 미국의 사회상을 서사시적으로 묘사했다. 이후에도 암살을 다룬 영화들은 부지기수로 나왔지만 그중 중요한 것들만 추려도 이렇다.

△라스푸틴과 황후(Rasputin and the Empress, 리처드 볼레슬라프스키, 1932)=제정 러시아 의 최후를 그린 영화. 요승 라스푸틴의 발호와 암살이 주요 요소다. 당시 미국을 주름잡던 배리모어 일가가 캐스트로 총출동해 화제가 됐다. 이 영화의 제작사인 MGM은 라스푸틴 암살을 주도한 펠릭스 유수포프 대공 내외를 잘못 묘사했다고 해서 송사에 휩싸였는데 이로 인해 ‘등장인물들은 모두 가공의 인물임(all persons fictitious disclaimer)’이라는 문구가 할리우드 영화에 정착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사형집행인도 죽는다(Hangmen Also Die, 프리츠 랭, 1943)=2차대전 당시 나치독일이 점령한 체코의 총독으로서 ‘프라하의 도살자’라는 별명이 붙여졌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암살사건을 느슨하게 극화한 것. 독일의 유명 극작가 브레톨트 브레히트가 할리우드 영화로는 유일하게 각본가로 참여했다. 하이드리히는 하인리히 히믈러에 이어 SS의 2인자이자 홀로코스트의 기획자이기도 했는데 영국에서 공수된 체코 출신 특공대에 의해 암살됐다. 원작전명이 ‘유인원 작전(Operation Anthropoid)’이었던 이 사건은 이외에도 ‘히틀러의 광인(Hitler's Madman, 더글러스 서크, 1943) ‘새벽의 7인(Operation Daybreak, 루이스 길버트, 1975), 안트로포이드(Anthropoid, 션 엘리스, 2016) 등으로 수차례 영화화됐다.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 1953)=셰익스피어 원작을 조셉 L 맨키위츠가 영화로 만들었다. 말론 브랜도(마크 안토니), 제임스 메이슨(브루투스), 존 길거드(카시우스), 루이스 캘헌(시저) 등 올스타캐스트가 동원됐다. 저 유명한 줄리어스 시저의 암살을 다룬 이 작품은 이외에도 1970년에 찰턴 헤스턴이 마크 안토니로 나온 스튜어트 버지 감독판이 있고(헤스턴은 1950년에 나온 데이빗 브래들리 감독판에서도 마크 안토니역을 맡았었고 존 길거드는 70년판에서는 시저역을 맡았다), 무수히 많은 TV극이 있다.

△만추리언 캔디데이트(Manchurian Candidate, 존 프랑켄하이머, 1962)=6.25전쟁 때 포로로 잡힌 미군 하사관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세뇌돼 미국으로 귀환한 뒤 최면에 걸린 상태로 대통령 암살을 시도한다는 이야기. 이 영화로 인해 ‘세뇌(brainwashing)’라는 말이 널리 알려졌다. 다소 동양적으로 생긴 할리우드의 대표적 악역배우 헨리 실바가 미국에 침투한 북한요원으로 나와 눈길을 끌었다.

△베케트(Becket, 피터 글렌빌, 1964)=12세기 말 영국 왕 헨리2세와 그의 절친한 친우였으나 적으로 돌아선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케트 간의 갈등을 그린 중세사극. 교회와 사이가 나빴던 헨리 2세는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에 자신의 절친한 술친구였던 베케트를 앉힌다. 그러나 대주교가 된 베케트는 헨리2세의 기대를 저버리고 교회편으로 돌아선다. 결국 헨리2세는 부하들을 시켜 베케트를 암살한다. 그리고는 그를 성인으로 선포한다. 프랑스 극작가 장 아누이의 희곡을 에드워드 안홀트가 각색해 아카데미 각색상을 받았다. 피터 오툴(헨리2세)과 리처드 버튼(베케트) 두 명우의 치열한 연기대결이 볼만했다.

이밖에도 ‘행정명령(Exwcutive Action, 데이빗 밀러, 1963)’ ‘JFK(올리버 스톤, 1991)’ 등 케네디 대통령 암살을 둘러싼 수많은 영화들이 있고, 알도 모로 이탈리아 총리, 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 등 암살당한 현실 정치인들과 관련된 영화들도 나왔다. 물론 가상의 암살영화들도 많이 만들어졌다. ‘패럴렉스 뷰(Parallax View, 앨런 J 파큘라, 1974)’ ‘패트리어트 게임(Patriot Games, 필립 노이스, 1992)’ ‘닉 오브 타임(Nick of Time, 존 배덤, 1995)’ ‘복서(The Boxer, 짐 셰리던, 1997)’ ‘더블 타겟(안트완 푸쿠아, 2007)’ ‘고스트 라이터(The Ghost Writer, 로만 폴란스키, 2010)’ ‘에스코바르: 실낙원(Escovar:Paradise Lost, 안드레아 디 스테파노, 2014)’ 등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민주화가 이뤄지기 전까지 그 어떤 암살영화도 상영되지 못했다. 이유야 두 말할 것도 없다.

◇사족=‘트로츠키의 살인’에서 알랭 들롱은 대단한 미스캐스트로 이 영화는 들롱의 경력에서 하나의 ‘흑역사’로 기록되지만 조셉 로지 감독은 몇 년후(1976) ‘무슈 클라인(M. Klein)’이라는 영화로 들롱에게 진 빚을 갚았다. 2차대전 중 독일 점령 당시 박해받은 프랑스 유대인들의 이야기인 이 영화에서 들롱은 클라인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유대인으로 오인당해 수난을 겪는 부유한 미술상으로 출연해 세계적 스타로 명성을 높였다. 이 영화는 프랑스의 아카데미상격인 세자르상 작품상, 감독상을 받았다.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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