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사상 처음으로 파면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2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청사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해 "국민들에게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성실히 조사에 임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전직 대통령이 범죄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는 것은 전두환, 노태우,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네번째다. 윤성호 기자


첫 ‘여성 대통령’ ‘부녀 대통령’에서 피의자로 전락
국가원수 위용 찾아볼 수 없고 다소 굳은 표정 드러내
“성실히 조사받겠다”는 말만 남기고 조사실로 직행
권불십년(權不十年) 절감케 하는 역사 되풀이 말아야

삼세판. 더도 덜도 없이 꼭 삼세판 만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1일 마침내 검찰에 출두했다. 송구하다는 말만 했을 뿐 끝내 ‘사죄’란 표현은 쓰지 않았다.

 전두환·노태우·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헌정 사상 네 번째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됐다. 왜곡된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불행한 주인공으로 전락한 것이다.

서울 삼성동 박 전 대통령 자택의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날 오전 9시14분쯤 철문이 열렸다. 검은색 승용차가 철문 밖으로 나왔다. 취재진들은 카메라 셔터를 눌렀지만 이 차량에는 박 전 대통령이 타고 있지 않았다.

오전 9시15분쯤. 박 전 대통령이 비교적 밝은 표정으로 자택을 나섰다. 박 전 대통령은 대기하고 있던 ‘에쿠스 8206’ 승용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심각하고 착잡한 모습을 예상했으나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지지자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박 전 대통령을 환송했다.

박 전 대통령은 자택 골목을 빠져나오면서 차 안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힘을 내라’는 건지, ‘끝까지 싸우자’는 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박 전 대통령을 태운 차량은 경찰과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중앙지검으로 향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파면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2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 포토라인에서 짤막하게 입장을 밝힌 뒤 청사로 들어가고 있다. 윤성호 기자

오토바이를 탄 취재진들이 박 전 대통령 일행을 따라가면서 곡예운전을 벌이며 열띤 취재 경쟁을 벌였다. 삼성동 자택에서 선릉역~역삼역~강남역~서울중앙지검으로 향하는 도로의 차로는 전면 통제됐다.

딱 9분. 삼성동 자택에서 서울중앙지검 청사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이다. 그동안 박 전 대통령은 검찰 1기 특별수사본부(특수본)와 박영수 특별검사의 수사를 사실상 거부했다. 박 전 대통령은 시간을 속절없이 흘려보냈다. 그런 박 전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으로 2기 특수본의 조사를 받기 위해 출두하는 데 걸린 시간은 9분에 불과했다.

박 전 대통령은 오전 9시24분쯤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에 도착했다. 박 전 대통령은 안내하러 나온 검찰 관계자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리고는 다소 굳은 표정으로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 포토라인으로 걸어갔다.

현직 시절과 파면 당한 뒤의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 국민일보DB

언론들이 포토라인에서 박 전 대통령이 ‘대국민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에 취재진들은 박 전 대통령을 주시했다. 박 전 대통령이 포토라인에 섰다. 취재진들은 역사적 장면을 놓칠세라 연신 셔터를 눌렀다. 

국민은 노태우·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출두 장면을 떠올리며 박 전 대통령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5년 11월 비자금 조성 혐의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 ‘박연차 게이트’의 피의자 신분으로 각각 대검찰청 포토라인에 섰다.

TV를 통해 생중계를 지켜본 국민의 눈도 당연히 박 전 대통령의 입에 쏠렸다. 지금까지 박 전 대통령은 1기 특수본과 특검팀의 기소 내용,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을 사실상 받아들이지 않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문도 발표하지 않았다.

 지난 12일 자택으로 복귀할 때도 민경욱 자유한국당 의원을 통해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박 전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취재진들이 질문을 속사포 같이 쏟아냈다. “검찰 수사가 불공정했다고 생각하느냐.” “아직도 이 자리에 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일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사과나 사죄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1995년 12월 ‘골목 성명’을 낭독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처럼 ‘뭔가 발표하지 않을까’ 하는 일각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박 전 대통령은 포토라인에서 이 말만 하고 서울중앙지검 청사 안으로 사라졌다. 지난 4년 동안 국가원수를 지낸 대통령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박 전 대통령의 눈에서는 특유의 ‘레이저 안광(眼光)’도 나오지 않았다. 

전직 대통령들 모습. 국민일보DB

첫 ‘여성 대통령’과 ‘부녀 대통령’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전락한 피의자의 모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권불십년(權不十年)과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절감케 하는 순간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뇌물수수,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강요, 공무상 비밀누설을 포함해 13개 혐의를 받고 있다. 1기 특수본이 8개 혐의를, 특검팀이 5개 혐의를 공소장에 적시했다.

 검찰과 박 전 대통령의 혈투가 어떤 결말을 낼지 예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박 전 대통령을 끝으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점이다. 부끄럽고 퇴행적인 역사를 되풀이할 수는 없다.

염성덕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sdyu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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