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 <115>고딕호러의 계보 기사의 사진
‘크림슨 피크’ 포스터.
머릿속에서 잠자고 있던 ‘고딕(gothic)’이란 말이 오래간만에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크림슨 피크(Crimson Peak, 2015)’를 보고서였다. 멕시코 출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연출에 더해 공동각본, 공동제작까지 맡은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감상은 ‘아, 참으로 고딕적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고딕’이 무엇인가. 원래는 중세 유럽의 건축 스타일을 일컫는 말이지만 문예사조로는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융성했던 문학장르로 일반적으로 공포와 로맨스가 결합된 작품들을 말한다. 보통 1764년 영국의 작가 호러스 월폴이 출간한 ‘오트란토의 성(The Castle of Otranto)'을 효시로 꼽는데 ’고딕소설‘이라는 명칭도 2판부터 이 소설에 붙여진 부제 ’고딕 이야기(A Gothic Story)'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딕 영화는 고딕문학에서 출발한 영화의 한 장르다. 대개 젊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여주인공이 등장하고, 성적 억압이나 질투가 중요한 갈등요인으로 작용하며, 실제나 환상의 유령이 주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울러 더 중요한 것은 배경이 되는 장소다. 거대하고 사치스러운, 혹은 호화스러웠지만 퇴락한 고딕풍 대저택이나 장원, 성이 거의 필수적이다. 주제면으로 볼 때 고딕 영화는 삶과 죽음, 선과 악, 구원과 저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일반적으로 공포영화로 분류되지만 내면적으로는 로맨스영화라고 할 수 있다.

‘크림슨 피크’에도 이러한 고딕영화의 특징들이 모두 고스란히 담겨있다. 최근에는 ‘퍼시픽 림(2013)’ 같은 영화를 통해 로봇영화 감독 정도로 알려졌지만 스페인어로 영화를 만들던 초기에는 ‘악마의 등뼈(The Devil's Backbone, 2001)' ‘판의 미로(Pan’s Labyrinth, 2006)' 등 훌륭한 고딕 호러영화에 주력해 고딕 호러의 장인으로 불려 손색없던 델 토로의 작품다웠다. 델 토로는 ‘크림슨 피크’를 만드는데 영감을 준 작품으로 ‘공포의 대저택(The Innocents, 잭 클레이턴, 1962)’ ‘귀신들린 집(The Haunting, 로버트 와이즈, 1963)’ ‘엑소시스트(윌리엄 프리드킨, 1973)’ ‘오멘(The Omen, 리처드 도너, 1976)’ ‘샤이닝(The Shining, 스탠리 큐브릭, 1980)’을 들었지만 누가 봐도 이 영화는 ‘제인 에어(1943, 1996, 2011)’와 이를 살짝 변형시킨 ‘레베카(알프레드 히치콕, 1940)’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실 엑소시스트나 오멘, 샤이닝 등은 훌륭한 공포영화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고딕영화라고 할 수 없다. ‘리듬’이라는 특성을 제외하면 시(詩)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고딕 스타일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공포 외에 ‘로맨스’인데 그 영화들에는 로맨스가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딕영화의 대표격으로는 우선 고딕소설의 대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들을 로저 코먼이 영화화한 것들을 들 수 있다. ‘B급영화의 제왕’ ‘대중영화의 교황’으로 불리는 코먼은 대형 영화사의 입김으로부터 떠난 독립영화제작자 겸 감독으로 적은 예산 등 최소한의 제작여건만으로 괜찮은 영화들(개중에는 걸작으로 추앙받는 것들도 적지 않을뿐더러 거의 모든 작품이 흥행에 도 성공했다)을 만들어내 명성을 날렸다. 후대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그가 만든 영화는 대단히 많지만 그중에서도 포의 작품을 영화화한 것들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1959년부터 1964년까지 제작된 코먼의 ‘포 영화’들은 모두 8편이나 된다. ‘어셔가의 몰락(The House of Usher, 1960)' '함정과 추(The Pit and the Pendulum, 1961)' '때 이른 매장(The Premature Burial, 1962)' '공포 이야기(Tales of Terror, 1962)' '까마귀(Raven, 1963)' '저주받은 성곽(The Haunted Palace, 1963)' '적사병의 가면(The Masque of Red Death, 1964)' '리게이아의 무덤(The Tomb of Ligeia, 1964)'. 이중 ’때 이른 매장‘만 빼고는 모두 악역연기의 대가 빈센트 프라이스가 주연을 맡았는데 코먼표 영화답게 최소한의 예산과 제작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음에도 오늘날 ‘걸작’ ‘명작’ 대접을 받는다.

물론 고딕이라고 포만 있는 건 아니다. 고딕공포소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게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다. 후대에 쏟아져나온 괴물 및 뱀파이어 소설과 영화의 근본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두 작품은 숱하게 영화화됐다. 프랑켄슈타인의 경우 일찍이 1931년에 제임스 훼일 감독, 보리스 칼로프 주연으로 영화화된 이래 괴물의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아니라 괴물의 시각에서 이야기가 풀려나가는 버나드 로즈 감독의 2015년판까지 수많은 작품이 나왔고 셸리의 원작을 모티프로 후대의 작가들이 곁가지로 써낸 이야기들도 많이 영화화됐다. 그중 영화사적으로 중요하게 기록되는 게 ‘프랑켄슈타인의 신부(The Bride of Frankenstein, 제임스 훼일, 1935)'다. 일종의 속편인 이 영화는 속편은 원작을 능가할 수 없다는 일반론을 깨고 원작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드라큘라는 어떤가. 프랑켄슈타인과 마찬가지로 1931년 토드 브라우닝이 벨라 루고시를 기용해 첫 드라큘라 영화를 만든 이래 2014년의 ‘드라큘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Dracula Untold, 게리 쇼어)’까지 수많은 감독과 배우들이 드라큘라에 도전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게 영국 공포영화의 명가(名家) 해머영화사가 만든 일련의 드라큘라영화들이다. 테렌스 피셔 감독에 크리스토퍼 리가 주연한. 리는 루고시와 함께 드라큘라 배우로 쌍벽을 이룬다.

참고로 루고시의 드라큘라가 나오기 전 무성영화 시절인 1922년에 독일에서 표현주의 기법을 사용해 드라큘라가 먼저 영화화됐다. 그러나 판권문제로 인해 이 영화는 드라큘라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고 다른 이름을 사용했다. F W 무르나우 감독이 만든 ‘노스페라투(Nosferatu)'. 드라큘라영화의 실질적인 효시다. 노스페라투는 흡혈귀를 뜻하는 말로 뱀파이어를 대신한 용어였고 드라큘라 백작은 ’오를로크 백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옛날 옛적 영화임에도 여전히 무섭다.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은 1979년 클라우스 킨스키를 기용해 ‘뱀파이어 노스페라투’를 연출, 이 영화에 오마주를 바쳤다.

이외에도 고딕소설, 고딕영화로 분류되는 작품들은 부지기수다. 먼저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를 들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장르소설이라기보다는 본격 클래식문학으로 더 익숙하지만 이를 영화화한 것들은 고딕영화로 분류된다. ’제인 에어‘의 경우 1943년의 로버트 스티븐슨판(조운 폰테인, 오슨 웰스)과 1996년의 프랑코 제피렐리판(샬럿 갱스부르, 윌리엄 허트), 그리고 2011년의 케리 후쿠나가판(미아 와시코프스카, 마이클 파스벤더)이 유명하다. 또 ‘폭풍의 언덕’은 1939년의 윌리엄 와일러판(로렌스 올리비에, 멀 오베론)이 최고로 꼽히며 롤프 파인스, 줄리엣 비노쉬가 주연한 피터 코스민스키판(1992), 그리고 남자주인공 히스클리프역으로 최초의 흑인배우(제임스 하우슨)를 캐스팅한 2011년의 안드레아 아놀드판이 특기할 만하다.

이밖에 기억에 남는 고딕영화로는 ‘제인 에어’를 모티프 삼아 대프니 뒤 모리에르가 1938년에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레베카’와 수차례 영화화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원작 ‘지킬박사와 하이드씨’가 있다. 히치콕이 미국으로 건너와 처음 만든 영화인 ‘레베카’는 아카데미 작품상, 촬영상을 수상했다.

또 고전적인 것으로 ‘푸른 수염’ 설화를 차용한 ‘가스등(Gaslight, 조지 큐커, 1944)’은 잉그리드 버그먼과 샤를르 부아이에의 대표작으로도 유명하고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리메이크되고 있는 가스통 르루 원작의 ‘오페라의 유령(Phantom of the Opera)'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잭 클레이튼이 연출한 ‘공포의 대저택’은 여자 가정교사(데보라 커)가 악령에 씌인 아이들을 돌보러 귀신들린 대저택에 들어가 겪는 이야기인데 잔인하거나 충격적인 장면 하나 없이도 공포영화의 진면목을 보여준 고딕 컬트 클래식으로 꼽히고 있고 로버트 와이즈가 감독한 ‘귀신들린 집’은 초자연현상을 조사하러 귀신들린 집에 들어간 일단의 사람들이 겪는 모험담을 묘사하고 있는데 1999년에 잰 드 봉 감독이 리메이크했다.

또 비교적 나중 것들로 이탈리아 공포영화의 거장으로 꼽히는 다리오 아르젠토가 만든 ‘서스피리아(1977)’와 ‘슬리피 할로우(1999)’ ‘스위니 토드(2007)’ 등 팀 버튼의 영화들이 있고 실제 일어났던 ‘잭 더 리퍼 사건’을 모티브로 원래 만화(그래픽 노블) 원작인 ‘프롬 헬(From Hell, 휴즈 형제, 2001)’도 잘 된 고딕 호러영화의 하나로 꼽힌다.

어렸을 때부터 환상, 괴기, 공포 스토리에 빠졌다던 현대 고딕영화의 유망주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지만 요즘 와서 할리우드 대형 영화사들의 눈에 들어 슈퍼히어로영화나 로봇영화 등 자꾸 엉뚱한 데로 빠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고 진정한 고딕호러의 명장으로 남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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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온(프리랜서·영화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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