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116>중국 팬더링 기사의 사진
그레이트 월 포스터
대국연(大國然)하면서 중화패권주의에 함몰된 중국의 자존망대함이 뚝뚝 묻어나는 영화를 봤다. ‘그레이트 월(The Great Wall, 장예모, 2016)'.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서 만리장성을 의미하는 영어다. 이 만리장성이 흉노족 등 북방 이민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임은 역사공부를 조금이라도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런데 영화는 이 북방민족들을 흉측한 식인 괴물로 만들어놓았다. 중국을 침략하는 이민족은 사람도 아닌 괴물이라는 얘기다.

영화는 시대배경이 송나라다. 알다시피 송은 거란의 요나라에 시달리다 여진의 금나라에 황제가 포로로 잡혀가는 치욕을 겪으면서 중원지역을 뺏기자 양자강 이남으로 도망가서 겨우 연명하던 끝에 결국 몽골의 원나라에 멸망당했다. 한마디로 북방 이민족이라면 철천지원수다. 그런 만큼 그 후손 중국인들은 영화에서라도 이민족들을 끔찍한 몰골의 식인괴물로 만들고 싶었는지 모른다. 재미있는 것은 주연 매트 데이먼이 괴물을 물리치는 영웅 역할을 위해 헝가리에서 기마궁사(騎馬宮射)훈련을 받았다는 사실. 헝가리는 유럽 국가로는 특이하게 훈족의 후예가 세운 나라로 훈족은 곧 흉노족이다. 따라서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괴물로 상정된 흉노족을 물리치는데 흉노족의 궁술을 구사했다는 얘기가 된다.

어쨌거나 문제는 중국의 중화주의적 오만과 공산주의적 막무가내에 크게는 서구세계, 작게는 할리우드가 ‘동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중국 눈치보기, 나아가 중국에 아부하기(pandering)다.

이 영화는 미·중 합작이다. 그러나 중국영화이기도 하고 할리우드영화이기도 하다. 실제로 영화를 소개한 글들을 보면 헷갈린다. 제작비가 1억5000만달러인 이 영화는 이제까지 중국에서 만들어진 영화 가운데 가장 많은 돈을 들인 영화로 기록된다. 그런가하면 이 영화에는 홍콩 스타 유덕화(앤디 라우)가 출연하는데 그가 나온 첫 번째 할리우드영화라는 소개도 있다.

일부에서는 중국군 병사들을 이끌고 괴물을 물리치는 영화 속 영웅 남자주인공역을 미국의 톱스타 매트 데이먼이 맡은 것을 두고 중국배우가 할 역할을 백인이 가로챘다고 해서 ‘화이트워싱(whitewashing)'이네, ’백인 구세주 콤플렉스‘네 하는 말들이 나온다. 그러나 감독 장예모는 딴소리를 한다. “국제적인 스타 매트 데이먼을 기용하지 않고 중국배우를 썼다면 이 영화는 그저 또 하나의 중국영화가 됐을 것이다”. 말하자면 더 넓은 세계시장에서 통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즉 장삿속으로 국제적인 톱스타를 썼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버라이어티지의 아시아영화 수석비평기자인 매기 리의 분석은 또 다르다. “데이먼은 결코 화이트워싱의 예가 아니다. 오히려 영화가 진행되면서 원래 돈밖에 모르던 용병이었던 데이먼은 용기와 자기희생, 규율과 창의성 등 중국적인 가치들을 배워나가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 즉 막돼먹은 서구의 미개인이 중국문명에 감화돼 교양과 인격을 갖춘 ‘아(亞)중국인’으로 성장해간다는 얘기다. 그것 참.

하긴 장예모도 이 영화를 두고 “중국의 우수한 문화와 전통을 과시하려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말이 문화와 전통이지, 왜곡투성이다. 만리장성을 지키는 말단 창병(槍兵)들이 모두 멋진 갑주를 걸치고 로마 장군처럼 케이프를 휘날리고 다니는가 하면 수비대 총사령관은 젊은 여자다. 또 사람을 태운 열기구처럼 시대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도 안되는 ‘신무기’들이 등장하고 원시적일 게 분명한 흑색화약은 TNT의 폭발력을 능가한다. 그저 만화 같은 액션영화로만 보면 모를까, 조금이라도 전통문화 등 역사적인 맥락을 섞어 본다면 큰 일 날 영화다.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3억3000만달러의 흥행수익을 올려 나름대로 성공을 거뒀지만 북미에서는 7500만달러의 적자가 나는 등 참패했다. 이같은 흥행성적에서 보듯 이 영화는 세계 2위의 영화시장으로 떠오른 중국에 아부하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의 하나로 기록될 게 틀림없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영화시장 및 할리우드에 투자하는 영화계 큰손들로 인해 할리우드가 중국에 알랑방귀를 뀌어온지는 이미 꽤 됐다. 그럼 무슨 아부를 하는가. 우선 대만, 티벳, 그리고 천안문사태를 일절 다루지 않는다. 타부도 그런 타부가 없다. 또 과도한 폭력이나 섹스, 아울러 정치문제, 특히 중국 지도자들의 부패상 같은 것도 금물이다. 귀신 등 초자연적인 내용 역시 말할 것도 없다(중국은 유물론을 숭상하는 공산국가다). 할리우드가 중국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영화에 손을 댄 대표적인 예를 몇 개만 들면 이렇다.

①‘닥터 스트레인지(스콧 데릭슨, 2016)’=원작에는 티벳의 신비술사인 ‘태고인(Ancient One)'이 나오는데 알다시피 티벳은 중국에서 금기어고 금기지역이다. 그래서 영화는 이 인물을 켈트족의 신비술사로 바꿨다.

② ‘아이언맨 3(셰인 블랙, 2013)’=등장인물이 내놓고 중국산 우유를 마신다. 중국은 당시 우유가 수은에 오염됐다고 해서 난리가 났는데 이를 무마하려는 술책이었다.

③ ‘루퍼(리안 존슨, 2012)’=시간여행을 다룬 이 영화에는 원래 미래의 파리를 묘사한 장면이 있었으나 그것이 미래의 상하이로 바뀌었다. 그에 더해 등장인물이 이런 말도 한다. “난 미래에서 왔는데 당신은 미래의 중국에 가봐야 돼”

④‘카리브해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고어 버빈스키, 2007)’=중국배우 주윤발이 해적으로 나온 장면이 모두 삭제됐다. 중국인이 해적이라는 게 용납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⑤‘멘 인 블랙 3(배리 소넨펠드, 2012)’=멘 인 블랙 요원들이 중국인 구경꾼들의 기억을 지우는 장면이 삭제됐다. 기억을 지운다는 게 중국의 인터넷 검열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⑥‘월드워 Z(마크 포스터, 2013)’=원작에서는 좀비 바이러스의 발생지가 중국이었으나 중국상영판에서는 러시아로 바뀌었다.

⑦‘레드 돈(댄 브래들리, 2012)’=영화를 다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뒤늦게 미국을 침공한 나라를 중국에서 북한으로 바꿔쳤다. 그러니 영화 꼴이 말도 아니었을 수밖에.

⑧‘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앤소니 루소와 조 루소, 2016)’=어벤저스 멤버들이 중국제 비보 폰을 쓴다. 그러나 이는 말도 안되는 작태다. 어벤저스처럼 자금력이 풍부한 슈퍼히어로들이 그처럼 조잡스런 물건을 사용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데다 어벤저스는 미국정부의 지원을 받는데 미국정부가 요원들에게 그처럼 보안상 믿을 수 없는 싸구려 물건을 사용하게 하지는 않을 게 틀림없다.

⑨‘인디펜던스 데이 리서전스(롤랜드 에머릭, 2016)’와 ‘스타워즈 로그 원(개리스 에드워즈, 2016)=’인디펜던스 데이‘에는 앤젤라베이비, ’스타워즈‘에는 견자단이라는 중국배우가 출연한다. 필연적인 이유가 없음에도. 일설에 의하면 전편들이 중국에서 신통치 않은 흥행성적을 올린데 대한 반성의 결과라고.

⑩‘가라테 키드(하랄드 즈워트, 2010)’=이 영화는 1984년에 크게 히트한 동명의 영화(존 아빌드센)를 리메이크한 것임에도 중국상영판에서는 아예 제목부터 ’쿵푸 키드‘로 바뀌었다. 아울러 주인공을 괴롭히는 중국 불량배들도 모두 사라졌다.

⑪‘톱건 3D(토니 스콧, 2012)'=원래 1986년작인 이 영화는 입체(3D)로 재제작됐으나 중국에서는 상영이 금지됐다. 그 이유가 기상천외하다. 항공전에서 압도적인 미국의 위용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라나.

이렇게 제멋대로인 중국과 그런 중국의 눈치보기에 여념이 없는 할리우드를 보노라니 중국을 중국답게 객관적으로, 때로는 다소 경멸적으로 그렸던 옛날 할리우드 영화들이 생각났다. 중국, 나아가 아시아와 동양에 대한 편견이 담겨있어 좀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훨씬 현실적이었던 영화들.

우선 명장 로버트 와이즈가 감독하고 스티브 맥퀸이 주연한, 그리고 제리 골드스미스의 귀 익은 주제음악들이 아직도 귓전을 맴도는 ‘포함 산 파블로(Sand Pebbles, 1966)'가 떠오른다. 1920년대 양자강을 무대로 미국 포함 산 파블로호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중국인은 미국인의 배에서 일했다고 해서 동족에게 끔찍한 린치를 가하는 등 야만적인 농민과 쿨리로 그려진다. 그보다 좀 더 앞서는 ’북경의 55일(55 Days at Peking, 니콜라스 레이, 1963)‘이 있다. 20세기 초에 일어난 의화단의 난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 역시 서구문명에 저항하는, 아직 덜 깬 중국민중의 폭동을 그대로 묘사했다. 아예 아주 옛날 것으로는 펄 벅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고전 ‘대지(The Good Earth, 시드니 프랭클린, 1937)’가 있다. 가난한 농부 왕룽 일가의 생존을 위한 분투기인 이 영화는 그야말로 화이트워싱의 원조격이다. 남녀 주인공인 중국 인 농부 왕룽과 아내 오란을 각각 백인배우 폴 무니와 루이제 라이너가 연기했으니까.

사족=화이트워싱에서 팬더링까지 중국에 대한 할리우드의 인식은 상전벽해라 할 만큼 달라졌지만 그래도 아직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중국인 여주인공의 이름. ‘그레이트 월’의 중국인 여주인공의 이름 린 메이는 할리우드가 전통적으로 애용해온 극중 중국인 여자의 이름을 앞뒤만 바꿔놓은 것이다. 궁금한 이는 한번 찾아보기 바란다.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중국 여인의 이름은 10명 중 7~8명은 메이 린, 혹은 메이 링이다. 대체 이유가 뭘까.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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