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118>킹콩의 역사 기사의 사진
‘콩: 스컬 아일랜드’의 포스터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게 확실한 캐릭터 ‘킹콩’의 최신판인 ‘콩: 스컬 아일랜드(2017)’를 봤다. 거대한 유인원의 모습을 한 킹콩은 1933년에 나온 미국 RKO영화사의 동명 영화에 등장한 오리지널 캐릭터로 이후 수많은 리메이크작과 아류작을 낳았다. 33년판 오리지널은 영화사적 아이콘이 된, 킹콩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기어올라가는 장면, 빌딩 꼭대기에서 비행기와 싸우는 장면 등과 함께 스톱모션 기법을 이용한 특수효과로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으면서 당대 최고의 흥행작이 됐다. 킹콩은 첫 개봉 당시 176만달러를 벌어들여 그때까지 최고기록을 세우면서 파산지경에 처해있던 RKO사를 기사회생시키기도 했다. 아울러 별로 빛을 보지못하고 있던 여자 주연 페이 레이를 일약 톱스타로 만들었다.

킹콩은 물론 모험 괴수영화로 선전되고 그렇게 간주돼왔지만 한 꺼풀 벗기고 보면 흑인남자와 백인여자의 러브스토리를 은유한 에로영화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리메이크작들은 그저 단순한 모험 괴수영화로 킹콩을 다뤘다. ‘콩: 스컬 아일랜드’도 마찬가지. 실제로 조던 보그트-로버츠 감독은 “이 영화에는 어떤 은유도, 숨겨진 의미도 없다”고 말했다.

특히 이 영화는 미지의 야생세계에서 살아가던 킹콩이 인간들에게 사로잡힌 뒤 문명세계로 끌려갔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오리지널과는 아주 딴판으로 원래 킹콩의 ‘거주지’인 해골섬(스컬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일, 그중에서도 킹콩과 다른 거대 괴물과의 사투를 중점적으로 묘사한다. 킹콩과 백인여자의 우정, 혹은 애정 따위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물에 빠진 백인여자를 킹콩이 건져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장면이 오리지널의 킹콩 손바닥 위에 올라선 백인여자를 상기시킬 정도. 그러다보니 영화의 여주인공 브리 라슨은 오리지널의 페이 레이에 비해 역할이 형편없이 작고 극중 비중도 경미하다. 주연은커녕 기껏해야 조연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킹콩이 역대 킹콩과 다른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킹콩은 오리지널부터 인간 여자를 희생물로 바쳐야하고 인간을 해치는 괴물로 그려져 왔지만 이 영화에서는 거꾸로 다른 괴물들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수호신’으로 나온다. ‘괴수판 슈퍼히어로’라고도 할 수 있겠다. 킹콩이 역대 어느 영화, 특히 2005년의 피터 잭슨판(7.6m)보다 훨씬 큰 31.6m로 설정된 것도 그를 신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보그트-로버츠 감독은 말한다. 이런 부분을 제외하면 ‘콩: 스컬 아일랜드’는 한마디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지(秘地)에서 기이한 괴수끼리 싸우는 ‘잃어버린 세계(Lost World)'식의 전통적 눈요깃감 장르영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감독은 두 번째로 연출한 장편 상업영화인 이 작품을 조셉 콘래드의 심오한 중편소설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을 바탕으로 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 두 주인공 톰 히들스턴과 새뮤얼 L 잭슨의 극중 이름을 각각 콘래드, 그리고 소설 ‘암흑의 핵심’ 주인공인 말로우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라는 것.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이 영화를 ‘괴물이 있는 ‘지옥의 묵시록'’으로 만들려 했다고 한다. 대단한 야심이다.

하지만 그같은 시도가 성취됐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적어도 야생과 문명의 충돌이라든지 자연 대 인간의 갈등, 또는 하다못해 인종간 사랑 같은 진지한 이야기를 이 영화에서 찾으려 해선 곤란하다. 그저 킹콩과 도마뱀을 닮은 기이한 괴물의 사투를 흥미롭게 구경하면 된다. 원시시대 공룡을 되살려 킹콩과 맞서게 한 오리지널 및 피터 잭슨판과 달리 이 영화에 등장하는 괴물은 티라노사우루스 같은 공룡이 아니다. 뒷다리가 없이 앞다리만 두 개인, 그래서 앞부분은 도마뱀, 뒷부분은 뱀처럼 보이는 희한하게 생긴 생명체다. 그러나 새롭지는 않다. 1933년 오리지널 영화에도 등장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걸 그대로 베낀 것은 아니다. 감독에 따르면 그것을 토대로 한국영화 ‘괴물’, 일본만화 ‘원령공주’, 포케몬 등에 나온 괴물들을 모두 종합 참고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영화는 킹콩이 아니라 이 괴물이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비중이 크다.

사족-영화는 시대를 음악으로 표현하고 있다. 영화의 시대배경은 1970년대이고 등장인물의 다수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다. 그래서 월남전 당시 병사들 사이에 크게 히트했던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Bad Moon Rising' 'Run through the Jungle')이라든가 제퍼슨 에어플레인('White Rabbit')의 노래들이 영화 내내 배경으로 깔린다. 그런가하면 영화 말미에는 2차대전 때 스컬 아일랜드에 표류해 고립돼 살아온 2차대전 참전용사가 ‘We'll Meet Again’을 흥얼거리자 베라 린이 부른 오리지널 노래가 흘러나온다. 2차대전 때 사지(死地)로 떠나는 연합군 병사와 그 가족들이 다시 만나길 간절히 바라며 부른 이 노래는 당시 최고 히트곡 중 하나였다.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 블랙코미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의 엔딩곡으로도 쓰였다.

어쨌든 그렇다고 ‘콩: 스컬 아일랜드’가 아주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괴수영화로서는 상급이다. 카메라가 잡아내는 미지의 세계, 비경(秘境)의 모습은 감탄할만하고 특히 킹콩을 포함한 괴물들의 움직임과 싸움장면은 절로 눈이 크게 뜨일 만큼 사실감 넘친다. 꼭 진짜 같다. 사실 모든 영화가 거창한 주제 등 반드시 특별한 의미를 가져야 할까. 그렇진 않다. 어떤 영화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보면서 재미를 느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콩: 스컬 아일랜드’도 그런 점에서는 별로 나무랄 데가 없다.

킹콩은 1933년 이후 이런 저런 식으로 무수히 많이 만들어졌지만 판권을 획득해 만든 정식 리메이크라 할 만한 것은 몇 개 안된다. 우선 1976년 이탈리아의 명제작자 디노 데 라우렌티스 제작으로 존 길러민이 만든 ‘킹콩’이 있고 그보다 10년 뒤에 역시 존 길러민이 연출한 속편 ‘킹콩 2(King Kong Lives)'가 있다. 그리고 나온 게 피터 잭슨판이다.

이밖에 킹콩은 다른 나라에서도 만들어졌다. 고질라 같은 괴수영화로 유명한 일본은 일찍이 1962년에 ‘킹콩 대 고질라(혼다 이시로)’를 내놓은데 이어 1967년에도 ‘킹콩의 역습(혼다 이시로)’을 만들었다. 영국에서도 1961년 킹콩을 이름만 살짝 바꾼 ‘콩가’를, 1976년에는 킹콩의 성별(性別)을 암컷으로 바꾼 ‘퀸콩’을 내놨다. 또 짝퉁과 해적판의 본고장 홍콩에서도 1977년 쇼브라더스가 킹콩을 해적판으로 만든 ‘성성이 왕(猩猩王 The Mighty Peking Man)'을 내놨다. 놀라운 건 한국에서도 킹콩이 나왔다는 사실. 1976년에 개봉된 ‘킹콩의 대역습’이다. 입체(3D)로 제작된 이 영화는 감독이 폴 레더라는 미국인이고 출연진도 로드 애런츠, 조애나 컨스 등 무명의 외국배우들이 주연이다. 한국배우로는 이낙훈과 우연정이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날림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B급은커녕 Z급으로 평가된다.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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