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120> 느와르의 부흥을 기대하며 기사의 사진
‘밤에 살다’의 포스터
할리우드 영화 중에서도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고전 장르의 하나가 필름 느와르(film noir)다.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된 장르가 몹 필름(mob film)이라고도 하는 갱스터 영화다. 둘은 연원과 디테일에서는 다르지만 자주 겹친다.

최근에 나온 영화 한편이 이 겹치는 경우에 해당한다. 벤 애플렉이 주연에 감독까지 겸한 ‘밤에 살다(Live by Night, 2016)'. 1920년대 조폭(갱)들이 날뛰던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경찰 간부의 아들이었으면서도 암흑가에 투신한 아일랜드계 갱의 일대기를 그린 이 영화는 베스트셀러 작가 데니스 리헤인의 2012년작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애플렉이 각색도 한 이 영화는 ‘아이야 가라(Gone Baby Gone, 2007)’에 이어 그가 리헤인의 작품을 원작으로 연출한 두 번째 영화다. 그러나 성공작 평가를 받았던 ‘아이야 가라’와는 딴판으로 흥행과 비평 모두 실패했다.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실망스럽다”는 평이 많았고 일반 관객들도 평균 평점 'B'를 주었다. 흥행도 마찬가지. 제작비가 6500만달러 들었으나 전 세계에서 벌어들인 수입은 2200만달러에 불과했다.

이유가 뭘까? 내가 보기에는 무엇보다 주연을 맡은 애플렉이 험프리 보가트도, 로버트 미첨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할리우드 황금기 갱스터 영화와 느와르의 주인공으로 명성을 떨친 보가트나 미첨을 연상시키는 연기를 하려 애썼으나 역부족이었다. 또 영화의 주 공간적 배경이 플로리다였던 만큼 역시 플로리다를 배경으로 했던 갱영화 ‘스카페이스(브라이언 드 팔마, 1983)’의 앨 파치노처럼 보이려고도 했으나 역시 그는 파치노가 될 수 없었다. 이와 함께 영화 자체도 상당히 느슨하게 짜여져 있어 관객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 역시 이유가 될 것 같다. 리헤인의 원작이 미스터리, 범죄소설의 노벨상이라 할 에드거상 수상작이었음을 감안하면 애플렉의 각색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필름 느와르는 1930년대 대공황기를 지나면서 40년대 초부터 50년대 말까지 크게 유행한 영화들로서 주로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에서 유래한 시니컬하고 음울한 범죄드라마를 말한다. 본고장인 미국에서는 그저 ‘멜로드라마’로 부르던 이 장르는 프랑스의 영화비평가 니노 프랑크가 ‘필름 느와르’라고 이름 붙였다. 프랑스어로 ‘검은(어두운) 영화’라는 뜻이다. 이 장르를 대표하는 남자배우로는 보가트와 미첨 외에 로버트 라이언, 리처드 위드마크, 글렌 포드 등이 있다.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이 모체라는 데서 보듯 그 소설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더쉴 해미트(‘말타의 매’), 레이먼드 챈들러(‘거대한 잠’, ‘기나긴 이별’), 제임스 케인(‘우편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 코넬 울리치(‘이창’, ‘상복의 신부’)의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이에 비해 갱스터 영화는 일찍이 무성영화 초창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해 금주법 시대를 거치면서 1930년대에 활짝 개화한 뒤 별 기복 없이 면면히 그 흐름을 이어갔다. 갱스터 영화는 소소한 범죄보다는 암흑가를 주름잡던 마피아 등 조폭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뤘는데 조폭간 투쟁과 함께 존 딜린저, 알 카포네, 머신건(기관총) 켈리 등 실제의 악명 높은 갱들에 관한 일종의 ‘전기영화’도 많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배우로는 제임스 캐그니, 에드워드 G 로빈슨, 폴 무니, 험프리 보가트 등이 있고 이들 못지않게 유명한 조지 래프트는 어릴 적 친구가 나중에 악명 높은 갱으로 성장한 벅시 시겔 등이어서 전력이 실제 갱이었다는 소문에 휩싸이기도 했다.

필름 느와르는 그러나 50년대를 지나면서 서서히 시들기 시작해 60년대부터는 스릴러 또는 액션이 가미된 이른바 네오 느와르 영화가 간간이 선보였을 뿐 미스터리가 본령인 클래식 느와르는 끝이 났다. 대표적인 네오 느와르 작품으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케이프 피어(J 리 톰슨, 1962, 마틴 스코세지가 1991년에 같은 제목으로 리메이크)’ ‘포인트 블랭크(존 부어맨, 1967, 브라이언 헬겔런드가 1999년에 ‘페이백’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 ‘클루트(앨런 J 파큘라, 1971)’ ‘겟어웨이(샘 페킨파, 1972)’ ‘차이나타운(로만 폴란스키, 1974)’ ‘보디 히트(로렌스 캐스단, 1981)’ ‘원초적 본능(Basic Instinct, 폴 버호벤, 1992)’ ‘LA 컨피덴셜(커티스 핸슨, 1997)’ ‘메멘토(크리스토퍼 놀란, 2000)’ ‘멀홀랜드 드라이브(데이빗 린치, 2001)’ ‘신시티(로버트 로드리게스, 프랭크 밀러, 2005)’ 등.

이에 비해 갱스터 영화는 중간에 시드는 법 없이 현재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오히려 더 풍성해진 감이 있다. 총질을 근간으로 한 액션에 대한 대중의 기호는 예나 제나 변함이 없는데다 수작(秀作)들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제임스 캐그니와 험프리 보가트 등이 주름잡던 30~50년대 이후 갱스터 영화들은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시작을 알리는 명작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 아서 펜, 1967)’를 거쳐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걸작 ‘대부(Godfather 1972)’를 통해 중흥기를 맞았다. 이후 갱 영화는 ‘비열한 거리(Mean Streets, 마틴 스코세지, 1973)’ ‘스카페이스(브라이언 드 팔마, 1983)’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세르지오 레오네, 1984)’ ‘언터처블(브라이언 드 팔마, 1987)’ ‘좋은 친구들(Goodfellas, 마틴 스코세지, 1990)’ ‘밀러스 크로싱(Miller's Crossing, 코언 형제, 1990)’ ‘저수지의 개들(Reservoir Dogs, 퀜틴 타란티노, 1992)’ ‘파고(Fargo, 코언 형제, 1996)’ ‘폭력의 역사(History of Violence, 데이빗 크로넨버그, 2005)’ ‘디파티드(The Departed, 마틴 스코세지, 2006)’ ‘이스턴 프라미시즈(Eastern Promises, 데이빗 크로넨버그, 2007)’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 코언 형제, 2007)’ 등 영화사를 장식할 만한 작품들이 쏟아졌다. 이에 비하면 느와르는 초라해진 모습인데 느와르도 갱스터 영화처럼 ‘대부’ 같은 걸작이 나와 중흥기를 열어가면 좋겠다.

한편 ‘밤에 살다’는 그와 아주 흡사한 제목의 영화가 이미 있었다. ‘그들은 밤에 산다(They Live by Night, 1948)'. ‘이유 없는 반항’의 명장 니콜라스 레이의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는 제목은 비슷하지만 애플렉의 ‘밤에 살다’와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대공황기를 시대배경으로 한 에드워드 앤더슨의 소설이 원작으로 원제는 ‘우리 같은 도둑들(Thieves Like Us)'이다. 수없이 변용돼온 ’도망치는 남과여‘라는 스토리의 원형.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직계 조상이다. 그러고보면 리헤인이 옛날 영화 제목을 좋게 말해 슬쩍 차용, 나쁘게 말해 표절한 셈인데 제목 훔치기는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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