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완상은 한국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사회학자 중 한 명이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상식을 뒤흔드는 세력을 매섭게 비판하는 지식인이기도 하다. 한완상의 회고록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에는 그가 통과한 대한민국 현대사의 궤적이 담겨 있다. 후마니타스 제공

老학자, 약육강식 정글 속 참된 평화 꿈꾸다
개인사 회고하며 한국 정치사회사 기록
젊은이들 향한 메시지도…이사야가 꿈꾼 이상향
“탄핵 심판 30분 전 문재인 후보에게 전화했죠
촛불 염원 이루려면 적폐 청산이 중요하다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한완상 지음, 후마니타스, 336쪽, 1만7000원

“저는 헌법재판소가 탄핵 심판을 내리기 30분 전, 그러니까 3월 10일 오전 10시 반경 문재인 후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헌재 심판은 저는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문 후보도 동의하면서 8대 0으로 탄핵을 인용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제가 그때 그에게 전해 주고 싶은 메시지는 헌재 판결이 아니었습니다.… 촛불 열망을 정치권이 제대로 수용해 새 역사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지난 70년간의 구조적 적폐를 청산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제 말에 전적으로 찬성했고, 또 그렇게 할 것이라 다짐했지요.”

진보 진영의 원로인 서울대 명예교수 한완상(81)은 문재인과의 통화에서 촛불 명예시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값싼 통합의 유혹에 빠지지 말기를 바란다고 주문했다고 한다. ‘적폐 청산은, 진실 규명을 통한 국민 화해와 통합을 뜻한다. 적폐 청산과 화해 통합은 결코 별개의 과제가 아니다. 청산해야만 바람직한 통합이 가능하다. 청산 없는 통합이란 꼼수이거나 정치공학적 편법일 수밖에 없다. 청산이 먼저다. 청산 없는 통합은 마치 냄새나는 쓰레기와 배설물을 껴안고 사는 것과 같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라는 생각에서다.

이 책은 팔십 평생을 돌아본 한완상의 회고록이다. 한완상은 국내 대표적인 사회학자다. 고향은 경북 금릉, 출생지는 충남 당진, 어린 시절 대구에서 주로 지냈으며 김천중 경북고를 거쳐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에모리대에서 사회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1970년부터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재직하며 비판적 지식인으로 살아왔다. 박정희 독재정권과 신군부 시절 두 번 해직됐고 1980년 신군부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으며 미국 망명 생활도 했다. 김영삼정부 때 통일부총리, 김대중정부 때 교육부총리, 노무현정부 때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했다.

1부 ‘젊은 벗들에게 부치는 편지’, 2부 ‘새로운 역사에 부치는 편지’로 구성된 이 책은 지식인과 공직자로 살아온 개인사를 회고하며 한국 정치사회사를 기록했다. 시종일관 경어체로 책을 꾸민 저자는 회고록을 낸 데 대해 이렇게 적었다. “오늘 이 시점에서 지난 제 삶을 순간순간 돌아보는 것은 제가 겪었던 아픔과 구조적 부조리로 인한 고통이 적어도 우리 후손들에게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삶의 성찰을 통해 앞으로 새 시대를 열어갈 젊은 세대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담았다. 그는 겸허하게 말한다. “현재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지만, 그들은 또 나름의 ‘가장 고생 많은’ 세대가 될 것이니 이래라 저래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저 그들이 자신의 고생 많은 삶을 꾸려 가며 고민이 생길 때, 자신이 이 사회에서 왜 이런 삶을 살게 됐는지 성찰해 볼 수 있는 거울이 되면 좋겠습니다.”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라는 책 제목은 공동번역성서의 이사야 11장 6∼9절에서 따왔다.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이사야 11:6∼9)
기원전 8세기 유대 왕국에 살았던 예언자 이사야가 꿈꾼 이상향이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비극적 현실에서 갑과 을이 소통하는 참된 평화와 따뜻한 정의를 꿈꾸며 살아온 저자의 소망이 오롯이 담겼다.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오전 청와대 관저로 거처를 옮긴 이후 처음으로 여민관 집무실로 출근하는 길에 김정숙 여사의 배웅을 받고 있다. 왼쪽부터 주영훈 경호실장, 문 대통령, 김 여사, 송인배 전 더불어민주당 일정총괄팀장. 뉴시스

저자의 어릴 적 꿈은 ‘사회 의사(Social Doctor)’였다. 일제 식민지 잔재, 한국전쟁의 아픔, YMCA 모임 등을 통해 겪었던 역사적·사회적 부조리와 정치적 부패, 사회적 억압 등 한국 사회의 질병을 치료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꿈을 향한 의지는 전체주의 속성을 지닌 군대 생활을 경험하며 점점 더 강렬해졌다. 미국 유학을 통해서는 암기 위주의 한국식 교육의 문제점과 창조적 발상을 위한 탈학습의 교훈을 깨닫는다. “참다운 창조 능력은 기존의 것을 비우고 파괴한 후 그 빈자리에 새것을 채워 넣는 데서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지요.”

책은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에서 활동하며 독재정권에 맞서다 강제 해직된 이야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했을 때의 ‘희망의 힘’이라는 소중한 깨달음, 미국 망명객 시절 신학 공부를 하게 된 사연과 귀국 후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출범시킨 일, 1987년 민주화 이후 김영삼 김대중 양김의 대권욕과 분열상 등을 반추하며 굴곡진 한국 정치사를 그린다. 본인이 가까이에서 직접 경험하고 느낀 양김의 갈등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통일부총리, 교육부총리 당시 겪은 냉전 수구 세력의 저항과 보수 언론의 색깔론 시비에 대해서는 매섭게 비판한다. 서로를 이용해 기득권을 강화하는 남북한 수구 세력의 적대적 공생 관계의 비극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오늘의 한반도 현실을 염려한다. “북에서는 극좌 군부 세력이, 남에서는 친일 극우 냉전 세력이 권력을 잡고 끊임없이 남북 간의 긴장과 마찰을 부추기면서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노무현정부를 적대시한 기득권 세력의 집단따돌림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한탄을 금치 못한다.

그럼에도 이번 촛불혁명을 통해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보게 됐다며 21세기를 이끌어 갈 새로운 세대에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이제 2017년 현실로 돌아오게 되면, 희망과 절망이 거칠게 교차되고 있음을 저는 매일 목도합니다. 그러나 절망 중에서도 우리는 희망의 빛줄기를 더 확실하게 보게 됩니다.… 저는 올해 한국의 촛불 시민들이 노벨 평화상을 받을 수도 있겠다고 기대해 봅니다.”

한국 사회의 흐름을 심도 있게 관찰한 노학자의 깊은 성찰이 돋보이는 책이다. 그는 에필로그에서 새로운 질서를 세워달라고 당부한다. “독자들도 이사야의 꿈으로 우리의 비극적 현실을 바꾸는 일에 모두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여든 고비를 넘은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음미할 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간혹 앞뒤가 맞지 않게 시점을 잘못 표기한 부분이 나오고 오탈자 몇몇이 눈에 띄는 것은 옥에 티다.

박정태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t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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