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 뉴시스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로 일선 법관들의 집단행동인 ‘사법파동’ 조짐이 보이자 양승태 대법원장이 결국 입을 열었습니다. 법원행정처의 사법개혁 저지 의혹과 관련해 전국 18개 법원 가운데 12개 법원이 판사 모임을 열고 대법원장의 입장 표명과 전국법관대표회의 개최를 요구하자 그간 침묵을 지키던 양 대법원장이 직접 수습에 나선 것입니다.

양 대법원장은 오늘(17일) 법원 내부통신망을 통해 이번 사태 이후 처음으로 입장을 밝혔습니다. 골자는 전국 법관들의 의견을 듣기 위한 논의의 장을 마련하겠다는 것입니다. 양 대법원장은 “전국 법관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각급 법원에서 선정된 법관들이 함께 모여 현안과 관련해 제기된 문제점과 개선책을 진솔하고 심도 있게 토론하고 의견을 모을 수 있는 논의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법원행정처도 필요한 범위에서 이를 최대한 지원하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전국법관대표회의와 유사한 자리를 만들어 대법원장 본인이 직접 법관들의 요구사항을 듣고 해결책을 모색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양 대법원장은 이번 사태에 대한 유감의 뜻도 밝혔습니다. “사법행정의 최종적인 책임을 맡고 있는 저의 부덕과 불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 법관 여러분께 크나큰 충격과 걱정을 끼쳐드리고 자존감에 상처를 남기게 되어 참으로 가슴 아프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이어 제도 개선을 위한 환골탈태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나아가 이런 일의 재발을 방지하고 사법행정을 운영함에 있어 법관들의 의견을 충실하게 수렴해 반영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이번 사태를 맞아 향후 사법행정의 방식을 환골탈태하려고 계획함에 앞서 광범위하고 심도 깊은 논의를 통해 법관들의 다양한 시각과 의견을 취합하는 과정이 빠져서는 안 되리라 생각합니다.”

16일 서울 서초구 법원청사 모습. 뉴시스

이번 사태는 지난 2월 법원 내 최대 학술단체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사법개혁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사법부에 비판적인 학술대회를 준비하자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가 학술행사 축소를 일선 법관에게 부당 지시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촉발됐습니다. 여기에 판사들의 행적을 관리하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까지 터져 나왔습니다. 이에 따라 이인복 전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진상조사위원회가 발족했습니다. 조사위는 법원행정처 고위 간부가 판사들의 학술행사를 축소토록 압박하는 등 사법행정권을 남용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대법원 수뇌부의 개입에는 선을 긋고 일각에서 제기한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도 사실무근이라고 했죠. 하지만 발표내용에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책임 소재 규명이 불분명한 데다 블랙리스트 조사는 부실 그 자체였습니다. 법원행정처의 거부로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된 업무용 컴퓨터 등을 조사하지도 못했기 때문이죠.

이로 인해 지난달 26일 서울동부지법을 필두로 대전지법·인천지법 등의 일선 판사들이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지난 15일에는 국내 최대 법원인 서울중앙지법 판사들이 단독판사회의를 열어 “헌법적 가치인 법관의 독립이라는 관점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심각한 사태”로 규정하며 전국법관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기에 이른 거죠. 또 이번 사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이에 어떤 조치를 할지에 대해 사법행정권 최종책임자인 대법원장이 명확한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처럼 파문이 커지자 대법원장이 사실상 백기를 든 것이죠.

이번 사태는 사법부 개혁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의 병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선 판사들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대법관 제청권과 헌법재판관 3인 지명권을 가진 대법원장의 권한을 축소하고, 비대화되고 관료화된 법원행정처의 역할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사법개혁의 시동을 걸어야 합니다.

박정태 선임기자 jt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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