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육강식 대도시 버리고 나의 길 걸어가는 ‘낙타세대’

낙타의 원래 고향은 아프리카 밀림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사막으로 도망쳤다. 사자와 표범, 하이에나 같은 맹수가 우글거리는 약육강식의 정글을 버린 것이다. 그리고 사막에서 외롭고 힘든 길을 걷고 또 걷는다. ‘광야’의 삶 속에서 낙타는 모든 이들의 길잡이로 지금까지 생존해왔다. 낙타처럼 경쟁으로 점철된 대도시 첨단문명의 삶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대안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낙타세대’가 있다. 세상과 다른 길, 욕망이 지시하는 넓은 길이 아니라, 정반대의 좁은 길을 걷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10여년 직장생활 접고 '식빵공작소' 차린 조고운
서울 강서구 화곡동 ‘식빵공작소’ 조고운(35)씨는 오전 6시부터 식빵 발효에 나선다. 오후 5시까지 백약초효소 식빵. 천연발효종 식빵, 까르보나라 식빵, 초코식빵 등 20가지 이상의 식빵을 굽는다. 이곳은 빵마니아들의 작은 단골집이었는데, 2015년 SBSTV ‘생활의 달인'에 ‘서울 7대 빵집’으로 소개된 후 유명해졌다.

강민석 선임기자

1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진짜 꿈을 찾게 해준 곳이 ‘식빵공작소’다. 그는 불과 몇년 전만해도 유리창 너머로 빵 굽는 제빵사들을 동경했다. 근데 지금 자신이 바로 그 주인공이라 생각하면 행복하다고 말한다.

“대학에서 실내건축을 전공했는데 졸업 후 모든 꿈을 접고 오직 연봉만 보고 직장을 택했어요. 2005년 IT업체에 입사해 해외유통을 담당했는데 항상 목마름이 있었죠. 직장생활 10년쯤 됐을 때 나 자신을 위해 살아보고 싶었어요.”

그는 직장을 다니면서 한식 중식 일식 바리스타 제과제빵 자격증을 따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탐색했다. 식빵전문점 콘셉트로 가게를 내고 싶었다.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삭빵 만들겠다고 하니 친구와 가족들이 모두 극구 만류했다. 하지만 과감히 사표를 냈다. 가게를 오픈 한 후 현실은 너무 달랐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들었다. 그러나 오기가 생겼다. 숙련의 기간으로 여기니 마음이 훨씬 편했다.

강민석 선임기자

“처음엔 빵이 맛이 없어 주눅이 들었어요. 손님들의 친구 같은 조언이 큰 도움이 됐어요. 그들의 조언대로 하나씩 고쳐나갔고 메뉴를 업그레이드 했어요.”

그가 개발한 식빵종류는 40여가지. 이중 20여가지를 제품화했다. 밀가루에 천연 발효종을 더하고 24시간 저온 숙성시킨 종반죽을 더해 자신만의 식빵을 만들어냈다. 초창기 3000원대로 시작한 식빵값은 원재료가 올라도 빵값을 올리지 않았다.
“요즘 원재료 상승에 경기불황으로 문을 닫는 빵집이 늘고 있는데 저는 그동안 버틴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천국은 마치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마 13:33)는 성경말씀처럼 ‘주일은 쉽니다’란 팻말이 붙은 그의 빵집에서 꿈도 사랑도 부풀어간다. “저는 선교의 꿈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이 주신 재능으로 선교하는 꿈 갖고 있어요. 지금은 준비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노들섬 '음악의 섬' 만들고 싶은 이윤혁
이윤혁(35)씨는 좋아하는 음악이 이끄는 대로의 삶을 살아왔다. 서울시의 ‘노들꿈섬 운영자 공모전’에 당선된 사단법인 밴드오브노들의 사무국장인 그는 현재 서울 용산구 한강대교 아래의 노들섬을 ‘음악의 섬’으로 조성하는 꿈을 꾸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그는 대학입학 후 졸업까지 1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 긴 시간동안 꿈을 찾았다고 했다. 2002년 고려대 신소재공학과 입학 후 기숙사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음악만 듣고 저녁엔 친구들과 어울렸다. 3차례의 학사경고로 제적을 당했다. 이때 진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했다.

“부모님은 음악을 좋아하면 실용음악과를 가라고 하셨지만 그게 인생의 답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었죠. 고대 신소재공학과로 재입학하고 밴드 동아리에 가입했어요.”

그는 이때 처음으로 기타연주를 배웠고 화성학, 작곡을 독학했다. 뜻이 맞는 친구들과 팀을 꾸려 음악활동을 했다. 매주 1~2회씩 학교 앞 카페에서 자작곡을 연주했다. 1년 정도 지나자 자연스럽게 실력도 늘어 2011년 ‘이윤혁밴드’란 이름으로 앨범도 냈다.

강민석 선임기자

평생 좋아하는 음악을 위해 경제적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결심한 건 졸업 무렵이었다. 친구들은 대기업에 취업했지만, 그들의 반도 안 되는 연봉을 받고 음악산업에 뛰어들었다. LIAK(한국음악레이블산업협회)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음악산업 최전선에 있다는 게 좋았다. 어려운 미적분 문제를 풀거나 실험실에 있는 것보다 앨범을 기획하고 음악인을 만나는 게 행복했다.

“경쟁에 익숙한 청년들은 실패하면 뒤처질까봐 도전을 못해요. 제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마 실패를 아주 빠른 시기에 경험해봤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제 멋대로 살았던 시간이 부모님에겐 죄송하지만 그 시간이 있었기에 모든 게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그는 현재 음악생산자연대 실무간사로 봉사하며 음악산업 체질개선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는 좌충우돌했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라고 말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실패도 엄청 많이 했어요. 그 많은 실패에 좌절하지 않은 것은 저를 지탱해주는 영적인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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