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123>‘티베르 강변의 할리우드’ 기사의 사진
‘애천’의 포스터
요새 영화를 보다 지치면 향수를 느끼게 하는 옛날 영화를 찾아보는 평소의 버릇대로 오랜만에 고전영화를 봤다. 제목만으로도 고색창연한 ‘애천(愛泉)’, 한글로 풀이하자면 ‘사랑의 샘’ 쯤 될까. 원제는 ‘분수의 동전 세 개(Three Coins in the Fountain)'다. 멜로드라마와 달달한 사랑영화로 명성을 날린 진 네귤레스코가 감독한 1954년 작품으로 특히 이 영화는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으며 대히트를 친 프랭크 시내트라의 같은 제목 주제가로 더 유명하다.

2차 대전 후 로마에서 일하고 있는 세 미국 여성의 사랑이야기가 주 내용이지만 당시로서는 미국 관객들에게도 이국적이었을 이탈리아의 수려한 풍광을 담은 ‘관광영화’이기도 하다. 실제로 영화는 오프닝 크레딧이 떠오르기 전부터 로마와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각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시내트라의 주제가를 배경에 깔고서. 하긴 제목 자체도 ‘관광성(觀光性)’이다. 로마시내에 있는 트레비분수에 동전을 던져넣고 다시 로마에 올 수 있게 해달라고 빌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관광성 속설’이 그 유래니까.

2차 대전이 끝난 지 채 10년이 안 된 로마와 이탈리아는 전쟁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는 다소 초라한 모습이지만 대신 전 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들로 버글대는 요즘에 비하면 대단히 한가하고 여유롭다. 거기에 진 피터스, 도로시 맥과이어, 매기 맥나마라라는 세 미녀배우가 루이 주르당, 롯사노 브랏지 등 ‘라틴 러버’들과 어우러지니 로맨틱하고 정겨웠던 옛날에 대한 향수가 절로 피어오를 수밖에. 마치 ‘시네마 천국’을 볼 때처럼.

‘애천’을 보면서 생각나는 게 있었다. ‘티베르 강변의 할리우드’다. 아다시피 티베르강은 로마시내를 흐르는, 말하자면 로마를 상징하는 ‘로마의 한강’이다. 그런데 티베르 강변의 할리우드라니? 요즘은 봄베이(뭄바이)와 할리우드를 합성한 ‘볼리우드’라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티베르 강변의 할리우드’는 생소하다고 할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두 용어는 생김새는 비슷해도 쓰임새는 전혀 다르다. ‘볼리우드’가 인도의 할리우드, 즉 할리우드 못지않은 인도 영화계라는 뜻으로 쓰인다면 ‘티베르 강변의 할리우드’는 비유컨대 할리우드가 티베르 강변에 ‘지사를 냈다’는 뜻, 즉 할리우드가 로마로 옮겨왔다는 의미다.

할리우드는 2차 대전 후 영화제작비가 앙등하자 제작비가 싸게 먹히는 로케이션 장소를 찾아 국외로 눈을 돌렸고 거기에 들어맞는 게 로마였다. 우선 미국보다 물가가 많이 싸고 전쟁 직후라 돈 되는 일이라면 모두 환영 받은데다 로마와 이탈리아는 널린 게 고대, 중세 유적이었다. 굳이 사극용 세트를 만들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더 결정적이었던 것은 치네치타라는 훌륭한 대형 스튜디오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치네치타는 무솔리니가 1937년 이탈리아영화의 중흥을 위해 건설한 대규모 영화 스튜디오로 전쟁 중 공습으로 파괴됐으나 종전 후 복구됐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 영화는 물론 많은 할리우드 영화들도 1950~60년대에 이곳에서 촬영됐다. 그래서 생긴 용어가 ‘티베르 강변의 할리우드’였던 것.

‘티베르 강변의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을 보자. 원래는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 검투사 영화 등 B급 액션사극, 이른바 ‘검과 샌들’영화가 많이 만들어졌으나 로버트 테일러와 데보라 커가 주연한 ‘쿼바디스(머빈 르로이, 1951)’가 흥행에 크게 성공하자 톱스타들을 기용한 블록버스터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지 시작했다. 한편 ‘쿼바디스’에는 소피아 로렌이 무명의 엑스트라로 출연했는데 로렌은 티베르 강변의 할리우드에서 조연이나 단역으로 출연했던 수많은 이탈리아 배우들 중 나중에 국제스타로 성장한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그 다음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명제작자 디노 데 라우렌티스와 카를로 폰티, 두 사람이 공동 제작하고 킹 비더가 연출한 ‘전쟁과 평화(1956)’였다. 오드리 헵번, 헨리 폰다, 존 밀스, 비토리오 가스만, 멜 페러 등 올스타캐스트가 출동한 이 톨스토이 원작 영화는 촬영에 잭 카디프, 음악에 니노 로타 등 스태프도 일급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이 ‘트로이의 헬렌(1956)’과 불멸의 ‘벤허(1959)’다. 명장 로버트 와이즈가 감독한 ‘트로이의 헬렌’은 그 유명한 트로이전쟁을 다룬 영화로 브래트 피트가 주연한 ‘트로이(볼프강 페터젠, 2004)’의 원조영화라 할 수 있다. 다른 점은 ‘트로이’가 아킬레스(브래드 피트)에게 초점이 맞춰져있는데 비해 헬렌에게 큰 비중이 실려있다는 점이었다. 헬렌역은 이탈리아 여배우 롯사나 포데스타가 맡았는데 당시 20대 중반의 그 빛나는 미모는 정말 인류 역사상 최고미녀로 손꼽히는 헬렌역을 맡기에 손색이 없었다. 특기할 것은 당시 신인이었던 브리지트 바르도가 헬렌의 시녀역으로 살짝 얼굴을 비쳤다는 점.

윌리엄 와일러의 역작인 ‘벤허’는 더 소개할 것도 없다. 11개 부문에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이 걸작은 2016년에 카자흐스탄 출신의 티무르 베크맘베토프 감독이 1억달러나 들여 리메이크작을 만들었지만 오로지 전차경주에만 전력을 쏟아부은 이 망작은 원작의 품격만 더 높여주었을 뿐.

이어 ‘티베르 강변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초대형 사극 ‘클레오파트라(조셉 L 맨키위츠, 1963)’로 정점을 찍었으나 이듬해 앤소니 맨 감독의 ‘로마제국의 멸망(1964)’부터 그 제목처럼 내리막길을 걸은 끝에 찰턴 헤스턴이 미켈란젤로, 렉스 해리슨이 교황 율리우스 2세로 나와 두 거물이 연기대결을 펼친 장중한 중세사극 ‘고뇌와 환희(The Agony and the Ecstasy, 1965)'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물론 ‘티베르 강변의 할리우드’ 작품 가운데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 것들도 적지 않다. 첫 번째가 당연히 오드리 헵번의 출세작 ‘로마의 휴일(윌리엄 와일러, 1953)’이고 두 번째가 이듬해 개봉된 ‘애천’이다. 뿐인가, ‘애천’과 같은 해 개봉된 멜로의 걸작 ‘맨발의 백작부인(Barefoot Contessa, 조셉 L 맨키위츠)’은 어떤가. 에바 가드너와 험프리 보가트 주연으로 치명적 매력을 지닌 가공의 스페인 무희의 인생과 사랑을 다룬 이 고전은 전형적인 할리우드영화였음에도 대부분 치네치타 스튜디오와 티볼리, 산레모, 포르토피노 등 이탈리아에서 촬영됐다. 이와 함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공중곡예 등 화려한 서커스가 볼거리였던 ‘공중 트라피즈(Trapeze, 캐롤 리드, 1956)’도 티베르 강변의 할리우드가 만든 영화로 잊을 수 없다. 버트 랭카스터와 토니 커티스가 공연한 이 영화는 또한 이탈리아의 대표적 여배우 중 하나인 지나 롤로브리지다의 할리우드 데뷔작이었다.

이처럼 티베르강변의 할리우드는 1950~60년대가 전성기였지만 영화제작여건이 우수한 로마의 치네치타 스튜디오는 그 후로도 끊이지 않고 할리우드가 애용하는 촬영지가 돼왔다. 이를테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앤소니 밍겔라 감독의 ‘잉글리시 페이션트(1992), 리어나도 디카프리오와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열연한 마틴 스코세지 감독의 ‘갱 오브 뉴욕(2002)’이 그렇고 TV시리즈였음에도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HBO와 BBC 공동제작의 ‘로마(2004~2007)’는 물론 지나치게 잔인하고 긴 예수의 고난 장면으로 인해 논란이 일었던 멜 깁슨 감독의 화제작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 역시 치네치타에서 촬영됐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를 수렁에 몰아넣은 독재자였지만 그래도 좋은 일 한 가지는 했구나 싶다.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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