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 <125>‘아서왕 영화’ 기사의 사진
‘아서와 멀린’의 포스터
끊임없이 영화화될 만큼 사랑받는 과거의 인물은 어느 나라에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순신 장군을 들 수 있고 서양, 특히 영국이라면 두말할 것 없이 로빈 후드와 아서왕이다. 다른 점이라면 이순신 장군이 역사적으로 분명한 실존 인물이라는데 비해 로빈 후드나 아서왕은 역사상의 인물인지 가공의 인물인지 불분명하다는 것.

그럼에도, 아니 오히려 그래선지 할리우드와 영국 등 서양에서 아서왕은 되풀이 영화화돼왔다. 최근에만 해도 영국에서 ‘아서와 멀린(2015)’이라는 독립영화가 나왔다. 마코 밴 벨이라는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제작비 300만달러에 촬영기간 24일이라는, 참으로 ‘독립영화다운 영화’다. 이처럼 제작비가 적게 들어선지 전반적으로 ‘싸구려’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또 톨킨의 ‘반지의 제왕’ 같은, 요새 유행하는 팬터지 사극에 너무 영향을 받은 탓인지 ‘반지의 제왕’류의 냄새도 풍겨낸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초저예산(돈이든 시간이든) 영화치고는 평단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아서왕 이야기가 처음 등장한 켈트족의 전설을 거의 원형대로 대단히 충실하게 옮겼다는 점이다. 앵글로 색슨족의 침입에 대항해, 또 드루이드교의 종교적 침략으로부터 켈트족을 지켜낸 아서왕 이야기.

나중에 아서왕과 그의 충실한 부하들인 원탁의 기사들은 기독교인으로서 예수가 최후의 만찬 때 사용했다는 ‘성배(聖杯)' 찾기를 필생의 임무로 여기지만 여기서 아서왕은 아직 기독교도가 아니다. 또 영화제목은 ‘아서와 멀린’이지만 영화에서 불리는 두 사람의 이름은 각각 켈트식인 ‘아스폴’과 ‘미어딘’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바위에 꽂힌 검을 뽑는 이야기도 없고, 아서의 멘토인 멀린은 통상적인 묘사처럼 나이 많은 늙은 마법사가 아니라 아서와 동년배의 젊은이로 그려진다. 아울러 우서 펜드라곤 왕의 아들로 널리 알려진 아서가 여기서는 콘월 영주의 사생아로 등장한다. 출신성분부터 일반적으로 알려진 왕족 아서와는 다른 것이다.

전투장면을 비롯한 액션은 몹신(mob scene)도 없는 등 어쩔 수 없이 싸구려 티가 역력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즘 세계 영화를 휘어잡은 중국식 액션을 흉내내지 않은 점이다. 서기 5~6세기 앵글로색슨족에 대항해 싸우는 켈트족 전사가 중국무술식 액션을 구사한다니 생각만 해도 황당한데 앙트완 후쿠아의 2004년작 ‘킹 아서’가 바로 그런 영화였다.

아서왕 이야기는 당초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진 민간전승 구비설화였지만 좀 더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먼머스의 제프리가 12세기에 라틴어로 쓴 ‘히스토리아 레굼 브리타니(브리튼 왕들의 역사)’를 통해서였다. 그때까지 브리튼과 웨일즈에 전해오던 이야기와 시들을 집대성한 것으로 물론 제프리의 창작도 들어가 있다. 하지만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그의 창작인지 구분하기는 어렵다.

아서왕 이야기는 워낙 판본이 많아서 정전(正典)이 따로 없지만 제프리의 저술은 우리가 알고있는 아서왕 이야기의 골간을 이룬다. 예컨대 아서의 아버지가 우서 펜드라곤 왕으로서 그가 멀린의 마법의 힘을 빌어 그의 적이었던 골루와로 모습을 바꾼 다음 골루와의 부인과 동침해 아서를 낳아 그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마법사 멀린 이야기, 아서왕의 왕비 귀니비어 이야기, 그리고 아서가 사용하던 마법의 검 엑스칼리버 이야기, 또 조카이지 반역자인 모드레드와 벌인 마지막 전투와 최후에 아발론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은 이야기까지.

그렇다면 우리가 잘 아는 아서의 충실한 부하들인 ‘원탁의 기사’들은? 역시 12세기 프랑스작가인 크레티앙 드 트루와가 아서왕 이야기에 그의 가장 유명한 부하이자 왕비 귀니비어와 사통한 프랑스 출신의 기사 랜슬롯의 이야기를 붙여넣고 아울러 원탁의 기사들에 의한 성배 찾기 모험담을 가미한 뒤부터는 아서가 조연으로, 그리고 원탁의 기사들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로망스’물들이 널리 퍼지게 됐다. 이에 따라 ‘아서왕 영화’들도 아서왕이 주연인 영화와 아서는 조연이고 기타 기사들이 주연인 영화로 나눌 수 있다.

‘아서왕 영화’는 거의 영화의 역사와 함께 한다고 할 수 있다. 무성영화 초기인 1904년에 이미 원탁의 기사 중 한명인 파르지팔(혹은 퍼시벌) 이야기가 영화화됐다. 1882년에 발표된 리하르트 바그너의 동명 오페라가 원작이었다. 그리고 이후 계속 이어지다가 할리우드 황금기인 1950년대가 되자 아서왕 영화들이 쏟아져나왔다. 우선 리처드 소프 감독의 고전 ‘원탁의 기사(Knights of Round Table, 1953). 로버트 테일러가 랜슬롯, 에바 가드너가 귀니비어 왕비역을 맡았고 아서는 조연급으로서 멜 페러가 연기했다. 이듬해에는 ‘흑기사(테이 가넷, Black Knight)’와 ‘프린스 밸리언트(Prince Valiant, 헨리 해서웨이)’가 나왔다. ‘흑기사’는 평민 출신의 청년(앨런 래드)이 귀족 여인의 사랑을 얻기 위해 흑기사로 모습을 바꾸고 아서왕을 도와 사라센인과 바이킹의 침략을 물리친다는 내용이고, ‘프린스 밸리언트’는 아서왕의 보호 아래 있던 기독교도 바이킹 왕국의 왕자 밸리언트(로버트 와그너)가 반역자 무리에 의해 나라를 뺏기고 아서왕의 카멜롯 왕궁으로 탈출해 기사 훈련을 받은 뒤 원탁의 기사 중 한명인 가웨인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되찾는다는 이야기다. ‘할리우드 키드’들에게는 추억어린 영화들이다.

또 1967년에는 조슈아 로건 연출로 아서왕 이야기가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리처드 해리스가 아서왕, 그리고 놀랍게도 스파게티 웨스턴의 스타 프랑코 네로가 랜슬롯을 연기했다. 재미있는 것은 네로와 귀니비어왕비 역을 맡은 영국배우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이를 계기로 진짜 연인관계로 발전해 결혼까지 했다는 사실. 그리고 1981년 아서왕 영화의 결정판 가운데 하나랄 수 있는 존 부어맨 감독의 명작 ‘엑스칼리버’가 선을 보였다. 현존하는 아서왕 이야기의 실질적인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토머스 맬로리의 15세기 로망스작품 ‘아서왕의 죽음’을 충실하게 옮긴 이 영화는 전부 아일랜드에서 촬영됐는데 다수의 아일랜드 출신 스타들을 발굴해내는 공도 세웠다. 헬렌 미렌, 리암 니슨, 가브리엘 번, 패트릭 스튜어트 등.

1995년에는 아서왕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마법사 멀린과 마법을 배제한 ‘첫번째 기사(First Knight)'가 공개됐다. 저명한 코미디그룹 ZAZ사단의 제리 주커가 감독한 이 영화에는 리처드 기어가 랜슬롯, 숀 코너리가 아서왕으로 나왔다. 숀 코너리는 이에 앞서 1984년 개봉된 ‘밸리언트의 검: 가웨인과 그린 나이트(스티븐 위크스)’에서 그린 나이트 역을 맡아 또 다른 아서왕 영화에 이미 얼굴을 비쳤다. 이어 2004년에 앙트완 후쿠아의 괴작 ‘킹 아서(King Arthur)'가 나왔다. 왜 괴작이냐 하면 아서를 로마 귀족 출신으로 설정한데다 아서와 부하들이 현란한 중국식 무술을 구사하기 때문이었다. 하긴 아서와 고대 영국을 점령했던 로마를 연결짓는 것은 새롭지 않다. 원래 웨일즈 이름인 아서(Arthur) 자체도 로마의 귀족 이름인 아르토리우스(Artorius)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으니까.

이처럼 로마와 아서왕을 접목한 내용의 영화는 이후에도 만들어져 2007년 ‘마지막 군단 Last Legion)’이 나왔고 이어 아서왕을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그린 기독교 아서영화 ‘펜드라곤: 아버지의 검(Pendragon: Sword of His Father, 2008)’이 개봉됐다. 아서왕 영화는 그리고도 계속 이어져 아서왕 출생 이전 마법사 멀린과 용들의 싸움을 그린 ‘멀린과 용들의 전쟁(Merlin and the War of the Dragons, 2008)’, 아서왕과 귀니비어 왕비 사이에 태어난 공주를 주인공으로 한 ‘멀린과 짐승들의 책Merlin and the Book of Beasts, 2009)'도 나왔다. 또 2014년에는 아서왕이 죽고 그의 누이 모르가나가 왕위를 계승한 뒤 용을 부하로 랜슬롯 등 원탁의 기사들과 싸운다는 ‘카멜롯의 용들(Dragons of Camelot)’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15년에 나온 게 ‘아서와 멀린’이었고 2017년에는 블록버스터급 아서왕 영화가 공개됐다. 가이 리치가 연출하고 찰리 허냄이 타이틀롤을 맡은 ‘아서왕: 검의 전설(KIng Arthur: Legend of the Sword)'이다. 지난 5월12일 2D와 3D로 미국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제작비가 물경 1억7천5백만달러나 된다. 그에 더해 이 영화는 마법사 멀린 대신 그의 조수라는 여인이 나와 멀린 역할을 하는가 하면 아서의 멘토 겸 원탁의 기사로 중국계 배우(톰 우)를 기용하는 등 대단히 ‘진보적’인 설정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처럼 할리우드와 영국에서 많이 영화로 만들어진 아서 이야기는 영어권이 아닌 프랑스에서도 심심치 않게 영화화됐다. 아마도 원탁의 기사 중 첫 번째로 꼽히는 랜슬롯이 프랑스 기사여서 그렇지 싶은데 크레티앙 드 트루와의 로망스를 바탕으로 랜슬롯과 귀니비어 왕비의 사련(邪戀)을 다룬 ‘랜슬롯 뒤 락(Lancelot du Lac, 로베르 브레송, 1974)’, 원탁의 기사 중 하나인 퍼시벌의 이야기인 ‘페르세발 르 골르와(Perceval le Gallois, 에릭 로머, 1978)’가 대표적이다. 또 당연히 TV극으로도 제작됐다. 그중에서도 마법사 멀린(샘 닐)의 시각으로 아서왕 이야기를 묘사한 미니시리즈 ‘멀린(Merlin, 스티브 배런, 1998)’과 호수의 귀부인(앤젤리카 휴스턴), 아서의 누이 모르가나 르 페이 등 여성들의 시각에서 아서왕 이야기를 다룬 미니시리즈 ‘아발론의 안개(The Mists of Avalon, 울리 에델, 2001)’가 수작으로 꼽힌다.

아, 만화영화도 있다. 월트 디즈니의 18번째 장편 만화영화인 ‘바위에 꽂힌 검(Sword in the Stone, 1963)'은 물론 일본에서도 TV용 아니메가 나왔다. ‘원탁의 기사 이야기, 불타라 아서’. 1979년부터 1980년까지 방영됐다.

앞으로 또 어떤 아서왕 영화가 나올지 궁금하다.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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