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그라비아 아이돌 시노자키 아이를 표지모델로 발탁한 남성잡지 맥심 2016년 2월호

그라비아는 대량생산에 적합한 인쇄법이다. 요판(凹版)을 프랑스어로 그렇게 부른다. 거의 모든 발명품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쾌락을 위해 사용됐다. 이제 ‘수영복 화보’ 정도로 의미가 변질됐다. 성 상품화 논란이 여전히 뜨겁지만, 경계와 편견이 조금씩 허물어지면서 주류를 넘나드는 서브컬처의 한 장르가 됐다.

1. 그라비아는 무엇인가

프랑스어로 Gravure. 원어 발음은 ‘그라뷔르’에 가깝다. 요판은 오목한 판을 뜻한다. 현존하는 인쇄법은 요판, 활판, 오프셋으로 압축할 수 있다. 활판은 활자 인쇄에 적합한 철판(凸版), 즉 볼록판을 활용한 기법이다. 오프셋은 필름을 인쇄기에 장착하는 화학기법. 평판(平版)으로도 불린다.

요판 인쇄는 표현할 부분을 동판에서 파낸 뒤 그 음각에 잉크를 채워 간행물을 찍는 기법이다. 사진을 대량으로 생산할 때 적합하다. 활자만 빼곡한 도서보다 신문 잡지 등의 발행에 주로 사용됐다. 재현이 어려운 요판 인쇄의 단점은 지폐 유가증권 우표 발행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라비아란 말은 이렇게 출판산업에서 비롯됐다.

인쇄소 자료사진. 국민일보 DB

2. ‘도색잡지’를 왜 그라비아라고 부를까

요판 인쇄의 기원을 정확하게 기록한 문헌은 없다. 다만 여러 주장만 있다. 2006년 찰스 해리슨의 저서 ‘르네상스 시대의 인쇄물’은 “1430년대 독일에서 나무 오목판으로 찍은 카드가 생산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산백과는 “1660년을 전후로 이탈리아에서 금속판 표면을 부식하는 방법의 오목판이 고안됐다”고 설명한다. 그라비아 윤전기가 등장한 시기는 1840년대로 추정되고 있다.

미국 신문‧잡지사는 1900년대 초 그라비아 윤전기를 도입해 간행물을 대량으로 생산했다. 이 틈새를 비집고 젊은 여성의 나체 또는 수영복 사진을 발행한 도색잡지 시장이 활황을 탔다. 노동자가 밀집한 도심의 가판대는 도색잡지로 넘쳐났다. 현세대에서 수영복 화보를 그라비아라고 부르는 이유는 새로운 인쇄법을 도입해 발행 부수와 이윤을 늘린 도색잡지가 간행물 시장에 잠식한 결과로 보인다.

일본 그라비아 모델 미야자와 리에가 18세 때 발행한 누드집 ‘산타페’의 한 장면

3. 주류문화 넘나드는 서브컬처

세계 최대 도색잡지 시장 중 하나인 일본은 ‘그라비아 아이돌’이라는 새로운 직업군을 창조했다. 1990년대 한국 일본 대만 홍콩 남성들의 마음속 깊숙한 곳으로 은밀하게 파고들었던 1973년생 일본 여배우 미야자와 리에는 대표적인 그라비아 아이돌이다. 미야자와는 18세 때 누드집 ‘산타페’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지금은 영화배우로 활동 중이다.

이런 잡지는 여전히 서브컬처로 여겨진다. 다만 서브컬처와 주류문화의 경계가 허물어진 인터넷망 보급 이후부터 부정적인 인식도 조금씩 사라졌다. 그라비아 모델은 포르노 배우와 다른 개념의 직업이지만 과거 대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라비아 모델은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하거나 신체를 모두 노출하는 경우가 드문데, 대중과 비평가들은 포르노 시장 범주에 이들을 넣었다. 1990년대 한국에서 미야자와가 그랬다.

2000년대 들어 그라비아 모델에 대한 인식은 조금씩 달라졌다. 그라비아 아이돌이 배우 가수 방송인으로 보폭을 넓히거나, 반대로 사회 곳곳의 유명인이 그라비아 화보를 찍는 사례가 많아졌다. 최근 2017 맥심 모델 어워즈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해 각 방송사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1992년생 일본 그라비아 모델 시노자키 아이가 대표적이다. 27일 일본 주간지 슈칸겐다이에서 현지 베테랑 사진작가 노무라 세이치와 그라비아 화보를 촬영한 프로골퍼 안신애도 영역을 깨뜨린 사례로 볼 수 있다.

국민일보 더피플피디아: 그라비아

더피플피디아는 국민(The People)과 백과사전(Encyclopedia)을 합성한 말입니다. 문헌과 언론 보도, 또는 관련자의 말과 경험을 통해 확인한 내용을 백과사전처럼 자료로 축적하는 비정기 연재입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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