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이 지난 14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박근혜정부 민정수석실 캐비닛에서 발견한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자필 메모를 들어보이고 있다. 일종의 청와대 내부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을 위한 증거가 제발로 걸어들어온 셈이다.

문재인정부에 '적폐(積弊)'가 다시 돌아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수석보좌관회의(수보회의)를 주재하며 수리온 헬기 납품 비리 등을 포함한 방산 비리를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직접 언급했다. 또 참여정부 때 운용되다 이명박정부들어 사장된 반(反)부패기관협의회 부활을 선언했다. 19일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문재인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며 국가청렴위원회도 부활시켜 반부패 컨트롤타워로 삼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지지층의 환호와 함께 대대적인 사정(司正) 작업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자 문 대통령은 19일 여야 4당 대표와 만나 “반부패기관협의회는 개별 사건이 아니라 제도 개선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더라도 검찰이 박근혜정부 청와대 ‘캐비닛 문건’과 방산비리 수사에 착수한 이상 당분간 적폐청산 드라이브는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많다.

 청와대도 일괄 사표를 제출한 박근혜정부 고위직 가운데 18일 장명진 방위사업청장의 사표를 선별 수리했다. 앞서선 검찰에서 이영렬 전 서울중앙지검장과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을 선제적으로 좌천시켰다. 검찰 수사와 사표 수리 방식을 보면 적어도 방산비리와 ‘우병우 라인’에 대해서는 ‘적폐’로 보는 청와대 판단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우병우 라인'은 전 부처에 남아있는 '최순실 국정농단'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돌아온 적폐청산
‘적폐’ 용어는 대선 캠페인 동안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당 중진들은 한결 같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뜯어 말렸다. 일단 어감이 살벌하고, 국민을 편가르는 인상을 준다는 뜻이 강했다. 무엇보다 ‘살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적폐’라는 공격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컸다. '응징' '원점타격' '패륜아' 등 주적 북한을 상대하는 군사용어나 강력사범을 평하는 언어에 가깝다. 대선 캠페인 막바지 문재인캠프가 잠시 강경 기류를 접고 화합의 메시지를 냈던 것도 이런 영향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휴지기는 길지 않았다. 당시 캠프 핵심관계자는 “우리도 쓰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여론조사를 돌려보면 국민들이 차기 정부에 바라는 압도적인 1순위가 적폐청산이었다고 한다. 국민적 공분이 높으니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뜻이다.

 문 대통령 역시 정치적 타협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문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나선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스스로 밝힌 이유는 ‘주류 교체’다. 문 대통령은 지난 4월 민주당 대선후보 수락연설에서 “대한민국 주류를 바꾸고 싶어서 정치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주류를 바꾸려면 친일파→독재세력→재계·언론 등으로 이어졌던 기득권이 청산돼야 한다. 문 대통령의 정치적 목적과 국민적 공분이 결합해 나온게 문재인캠프의 적폐청산 기조였던 셈이다. 그랬던 적폐가 취임 두달이 지나 다시 전면에 등장한 거다.

야권은 불편할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집권 후 반부패기관협의회를 신설하고 “참여정부 임기 내 반드시 부정부패 척결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당시에는 야권의 반발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김대중정부로부터 정권을 재창출한 만큼 특별히 야권을 상대로 표적수사 등을 할 우려가 없었던 거다.

 하지만 이번엔 정권이 교체됐다. 교체된 보수정권은 9년 반 동안 집권했다. 적폐청산을 제1기조로 내세운 문재인정부에서 본격적인 사정 드라이브가 걸리면 야권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여권 관계자는 “대대적인 사정 정국이 펼쳐지면 제일 먼저 긴장하는 게 국회의원”이라며 “여당 의원도 움츠러드는데 야당 의원은 말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취임 후 한동안 보혁(保革) 화합을 주제로 얘기했던 문 대통령이 다시 청산을 꺼낸 지금은 더욱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협치와 청산 사이
정부는 막무가내의 사정 정국을 만들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지금까지 예외는 단 2분야, 방산 비리와 ‘최순실 관계자’다. 방산 비리는 이미 감사원·검찰이 나서서 청산 작업에 돌입했다. 아직 임명되지 않은 후임 방사청장 인선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최순실 관계자’의 경우 일단 우병우 사단만 실체가 드러났다. 검찰 내 핵심 보직 2명이 공개적으로 체면을 구긴 끝에 면직됐다. 내부 감찰과 별도로 수사를 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 사건은 최순실 청산의 신호탄이라는 게 청와대 내부의 입장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미국 순방에 따라가지 못한 일부 기업들 역시 최순실 관련성 때문에 배제됐다. 나아가 각 정부부처별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최순실 국정농단 실태를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이른바 ‘최순실 청산 작업’은 사회 각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꽤 오랜 기간 진행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5당 체제의 복잡한 정치 지형 속에서 야권의 반응도 온도차가 있다. 보수야당은 반문(反文) 세력을 결집시키려 할 것이고, 진보야당은 더욱 강도 높은 청산작업을 요구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첫 타깃을 방산 비리와 최순실 국정농단 청산으로 잡은 것은 나쁘지 않았다는 평가다. 앞으로가 관건이다. 적폐청산 작업이 구체화되고 더욱 진전되면 반발도 더욱 극심해질 것이다. 적폐청산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매우 높은 상황에서 청와대가 이 '위치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할 지 궁금하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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