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상견례에서 장인어른은 물 한 잔 마시지 않고 “이 결혼 안 된다”고 말씀하시고 나가셨다. 말 잘 듣던 착한 딸이 이상한 놈 만나 정신이 홀려 있다는 게 장인어론 판단이었다. 결혼 전 종교 문제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결혼식장도 안 오신다는 장인장모님을 설득하느라 힘들었던 기억도 있다. 나도 사람인지라 결혼만 하면 처가 쪽하고 연을 끊고 살겠다는 못된 마음도 먹었었다.
병원에가면 인영이가 꼭 들리는 1층 수족관. 할아버지에게 자기 친구 물고기를 설명해주고 있다.

결혼 직후 서초동 검찰에 출입하며 야근을 밥 먹듯 하던 시절, 장인어른이 찾아오셨다. 잠깐 시간을 내라고 하더니 신세계 백화점에 가서 갤럭시 양복을 사주셨다. 식사라도 하고 가시라했는데 손을 휘저으며 가셨다. 12년 전 얘기다. 그렇게 조금씩 가까워져서 지금은 아침에 회사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하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신다.
할아버지와 봉구만 있으면 엄마 없어도된다는 무심한 딸.

아내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잠시 복직을 했다. 이번에도 장인어른께 SOS를 칠 수 밖에 없었다. 인영이가 아프기 전에도 장인어른은 육아 봉사를 해주셨다. 보통 장모님이 육아에 도움을 주는데 우리 장모님은 육아에 전념하기에는 매우 활동적이시다. 장인어른이 모든 음식을 다 하신다.

인영이는 엄마 잠깐 회사 가는데 그동안 할아버지가 봐줘도 될까라는 말에 흔쾌히 OK를 해 엄마를 서운하게 만들었다. 인영이에게 할아버지는 모든 걸 다 들어주는 천사 같은 존재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라면을 끓여 달라 해도, 30도가 넘는 땡볕에 놀이터를 나가자해도, 할아버지 핸드폰을 달라 해도, 장인어른은 웃으며 모두 들어준다. 항암약을 타러 인영이 병원에 데리고가는 것도 할아버지 몫이다. 인영이는 이런 할아버지에게 땡깡이란 땡깡은 다 부린다. 어제는 밖에 나갈 때 겨울코트를 입고 가겠다고 떼를 써 한동안 애를 먹으셨다고 한다.
번개맨 망토를 두르고 잔 인영이가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뭘 하고 놀까 고민하고 있다.

밤늦게 들어가면 장인어른이 마루에서 TV를 켜 놓은 채 코를 골고 계신다. 아이들 잔다고 TV는 항상 무음으로 해 놓으신다. 하루 종일 두 아이를 돌보는 일은 나와 아내의 직장 일을 합친 것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우리 부부는 알고 있다. 지난 금요일 퇴근길 아파트 주차장에서 장인어른을 만났다. 사랑하는 장모님에게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12년 동안 그렇게 환하게 웃으시는 장인어른을 본 적이 없다. 인영이가 아내만큼 나이를 먹었을때 나도 장인어른처럼 할 수 있을까.

언제부터 장인어른이란 말 대신 아버지라고 부른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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