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영이가 ‘꼬마 빈(한 달에 한 번씩 맞는 빈크리스틴이란 항암제인데, 용량이 적어 꼬마 빈이라 부른다)’을 맞는 날이었다. 일하는 아내 대신 휴가를 내고, 장인어른께는 휴가를 드렸다. 일찍 자면 아침에 라면 끓여준다는 어젯밤 말에 인영이는 가족 중 가장 먼저인 6시30분에 일어났다. 정말로 두 딸은 7시에 라면을 먹으며 행복해했다. 아내를 은행에 내려주고 서울로 출발했다. 지난 1년 동안 병원 가는 일은 대부분 휴직한 아내 몫이었다. 전날 주의사항을 들었지만 조금 긴장됐다.
번개맨 출동준비 완료. 빗속을 뚫고 병원으로 고고.

10시 병원 도착. 가장 먼저 들려야 할 곳은 채혈실이다. 혈액검사를 통해 백혈구 수치 등을 확인해 이상이 없어야 항암제를 맞을 수 있다. 아내 말대로 ‘한 번에 잘 뽑는’ 여성 간호사에게 인영이 팔을 맡겼는데 오늘따라 한 번에 성공하지 못했다. 눈을 질끈 감고 다시 왼손을 내놓는 인영이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아빠는 왠지 미안해 2번 찔렸으니 집에 갈 때 장난감 2개 사준다고 먼저 말해버리고 말았다. 장난감이란 단어에 경기를 일으키는 아내의 얼굴을 애써 지웠다.
진료대기시간을 틈 타 피자를 즐기는 두 딸. 이태리 남자를 데려올라나...

진료시간까지는 30분정도 시간이 남는다. 라면 말고 제대로 된 아침을 먹이려고 병원 지하식당으로 내려갔는데 두 놈 모두 피자를 외친다. 아침에 피자. 이탈리안이라도 되는 듯 딸 둘 모두 열심히 먹는다.

다시 3층으로 올라와 인영이 키와 몸무게를 재고, 진료카드를 찍고 순서를 기다린다. 다행히 수치는 좋다. 이제는 외래병동 주사실로 가야한다. 접수를 하는데 역시나 오늘도 침대배정은 안된단다. 어린이 휴게실 소파에서 두 아이와 함께 기대있다 깜박 잠이 들었다. 벨소리에 선잠을 깬다. 순서가 됐단다. 인영이 가슴관에 바늘을 꼽고 1시간여 가량 수액과 꼬마빈을 맞았다. 주사 맞는 도중 진료비를 계산해야 한다. 그래야 2주일동안 먹을 항암약이 빨리 나온다고 아내가 신신당부했다. 인영이는 링거대를 타고 복도를 오가며 주사를 맞았다. 1층 약국에 가서 항암약을 타는 것을 마지막으로 당일입원이 끝났다.
인영이 뿐 아니라 어린 환아들이 복도에서 링거대를 끌고 다니면서 어른도 힘들다는 항암주사를 맞는다. '나라다운 나라'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점심을 먹이고 출발하는데 빗방울이 굵어진다. 폭우에 운전하느라 정신없는 아빠는 아랑곳없이 두 딸은 뒷 자석에서 쉴 새 없이 떠든다. 수원쯤을 벗어나 빗방울이 가늘어지자 두 아이도 곯아떨어진다. 세종에 다 와서야 인영이 기저귀를 한 번도 안 갈아줬다는 생각이 든다. 장난감백화점에 가서 살펴보니 기저귀를 다 적시고 옷과 카시트까지 젖어있다. 감기에 걸릴까싶어 뒤늦게 주차장에서 옷과 기저귀를 간다. 인영이는 다행히 작은 장난감 2개를 골랐다. 5시20분. 집에서 나온 지 10시간 만에 귀가다.

아이들을 재우고 하루를 뒤돌아보니 인영이도 의젓해졌지만 나 역시 많이 바뀌었다. 1년 전 가슴관에 바늘을 꽂을 때 채혈을 같이 하면 따로 채혈실에 가서 팔에서 채혈을 안 해도 되는데 왜 그걸 안 해주냐고 따지던 모습 대신, 채혈실에서 혈관을 찾기 위해 인영이 살갗을 헤집는 바늘을 조용히 바라볼 뿐이다. 처음엔 민머리의 어린 아이들이 항암제를 맞으며 복도를 헤매던 모습에 충격을 받았지만 이제는 침대배정이 안 된다는 말에도 웃으며 “네” 한다.
긴 하루의 끝이 보이는 차안. 두 딸과 함께한 10시간의 데이트는 행복했다.

국민들이 국가에 바라는 것이 많은 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생각한다. 내 경우, 아픈 아이들을 위해 국가가 무엇인가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실망으로 바뀐 지 오래다. 무균병동 입원실이 없어 집중항암치료 때마다 하룻밤에 20만원이 넘는 병원 앞 호텔방을 예약하는 것이 일상이 된지 오래다.

문재인 대통령이 며칠 전 인영이가 치료받는 병원을 찾았다. 백혈병을 앓으면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격려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오늘 병원에서 한 환우 어머니가 “기자 맞으시죠?”하며 백혈병 등 소아암 경험자 대입 특별전형이 과거보다 오히려 축소됐다며 안타깝다고 하셨다. 아직까지 건강장애학생을 위한 사이버교육을 담당하는 공교육기관 하나 없는 게 현실이다. 나라가 모든 것을 해줄 수 없지만 최소한 아픈 아이들과 그 부모들에게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게 ‘나라다운 나라’일 것이다. 단순히 아픈 아이 머리 한번 쓰다듬어 주고 끝나는 감동은 ‘쇼’에 다름 아니다. 모르는 환우 부모님들께 “나라가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 싶다.

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


더 보기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