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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역사여행-이일선 목사] 슈바이처, 한국 목사 귀하게 맞이하다

“교회가 이만치 성장했으면 목사님 양복 정도는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새 양복을 그렇게 번번이 남 주시면 총회와 노회에서 저희 체면이 안 섭니다. 우리는 교회를 떠나겠습니다.”

1959년 11월 아프리카 가봉으로 들어가 슈바이처 박사의 수련의로 오지 의료선교를 나섰던 이일선 목사. 가봉 람바레네병원에서 밀림 의료사역을 떠나기 전 찍은 사진. 허리춤에 손을 대고 있는 사람이 이 목사.

“나야 주일 빼고 늘 나병환자와 지내고 주일은 흰 가운 입으니 새 양복을 입어 무엇 합니까. 총회야 일 년에 한 번가고요. 장로, 권사, 집사님들 사정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나병환자들이 진물 투성이 옷을 입고 사는데 내가 새 양복 입고 가면 그들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정히 그러시다면 새 양복은 아껴서 꼭 입고 가야할 자리에만 입고 가겠습니다. 그러니 나간다는 말은 거두어 주십시오.”

6‧25전쟁 전후 서울 성동구 약수동 신일교회 당회 풍경이다. 1945년 천막교회로 시작한 신일교회는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예배를 드려야할 만큼 교인이 넘쳤다. 비슷한 시기 설립된 영락교회 경동교회 충무교회와 함께 ‘성공한 교회’였다.

서울 신일교회 설립자이자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이일선 목사(1922~1995). 장준하 강원룡 등과 함께 조선신학교(한신대)를 졸업하고 한센병 환자 치료를 위해 서울대 의대에 진학해 피부과 전문의가 된 의사이자 목사요, 의료선교사였다. 동시에 사회사업가이기도 했다.

17세에 슈바이처(노벨평화상 수상자)의 신앙과 인류애에 반해 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4권의 저서를 집필하고 1958~59년 슈바이처가 의료선교를 벌이던 아프리카 가봉공화국(당시 프랑스자치공화국) 람바레네병원의 초청을 받아 그로부터 지도 받았던 유일한 한국의사였다. 슈바이처가 피아노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듯 그는 시로 찬양한 예술가이기도 했다.

이일선 목사와 슈바이처(오른쪽)가 가봉 의료사역 현장에서 함께 한 모습.

그는 1960·70년대 서구와 일본, 그리고 국내 언론으로부터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지면을 달궜다. 더불어 1961년 5‧16쿠데타 당일 총소리를 들으며 울릉도로 의료선교를 위해 들어갔던 ‘울릉도 근대화’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의 명성은 울릉도로 떠날 때 환송연이 열린다고 일간지에 보도될 정도였다. 성공한 목회자로, 존경받는 의사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사람이 이일선이었다.

그런데 다 내려놓고 울릉도로 떠났다. 목선을 타고 20~40시간 항해해야 닿을 수 있는 외딴섬이었다. “그곳에 60여명의 나환자와 섬주민 3분의 1이나 되는 결핵환자가 있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 때문이었다.

그는 1970년대 말부터 서서히 잊혀졌다. 1995년 그는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한국의 슈바이처는 쓸쓸하게 세상 사람들과 작별했다. 바울의 제자 디모데의 순교와 같은 박해와 고통을 안고 하늘나라로 향했다.

해방 직후 신당제일교회(현 신일교회)를 세운 이일선 목사가 교인들과 기념촬영한 사진. 건물 앞 나무 십자가 탑이 보인다.

나환자에게 양복 벗어주는 주는 목사님
‘한국의 슈바이처’를 알게 된 것은 신일교회를 섬겼던 무명의 노 권사가 남긴 일화를 우연히 읽고서였다. 교회 장로회와 여신도회가 “제발 양복 벗어 남 주지 말라”고 당부함에도 허허 웃으며 “나환자 치료하기 때문에 좋은 양복이 필요 없고, 주일에는 가운을 입습니다”고 쑥스럽게 거절하는 목사. 장로 등 교인이 ‘불출석’이라는 배수의 진을 치고 읍소하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풍경. 이런 노 권사의 회고담은 ‘아, 주님’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게 했다.

지난 8월 초 신일교회(배요한 목사) 김성복(61) 장로를 교회 역사관에서 만났다. 역사자료실이 맞다고 해야 할 만큼 작은 규모였다. 김 장로는 “어떻게 이일선 목사님을 아시냐”고 반색했다. 노 권사의 일화에 나오는 인물이 이 목사가 맞느냐고 묻자 “예 맞습니다. 그러고도 남을 분입니다”라고 답했다. 

서울 신일교회역사관에 전시된 슈바이처의 기도하는 손 동상. 병든 흑인 환자를 치료한 뒤 기도해 주던 손이다. 슈바이처가 수련의 이일선 목사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김 장로는 이 지역에서 평생 안경원을 하며 교회를 섬겼다. 그는 청계천 헌책방거리에서 고서를 챙기는 취미가 있었다. 그 교회 90대의 원로장로 등 교회 1세대의 기억을 정리하는 누가와 같은 조용한 사명자가 김 장로였다. 신일교회는 한때 영락교회와 함께 손꼽는 대형교회였다.

신일교회는 1954년 장로회 경기노회 분열 당시 이일선 목사가 ‘하나님의 공동체가 분열이 웬 말이냐’며 어느 쪽으로도 가담을 거부해 중립 무소속교회로 이어지다가 1981년에 서울노회로 복귀, 통합교단에 속할 수 있었다.

신일교회역사관 한쪽에 그가 슈바이처로부터 받은 선물과 서한 등이 보존되고 있었다. 슈바이처 박사와 같이 찍은 사진, 적도 밀림을 오가며 의료봉사에 나서는 이 목사의 환한 얼굴 사진도 있었다. 약수동은 1980년대까지 금호동 옥수동 등 산동네를 끼고 있는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였다. 가난한 이들이 많았다.


해방 전후 신당동에 살았던 이 목사는 어머니 강신성의 서원기도로 목사가 됐다. 농사꾼 아버지가 일찍 죽고 예수 영접한 어머니 밑에서 2남 1녀가 지독한 가난을 이겨내며 살았다. 그는 학교 급사를 하며 공부했다. 성경 암송이 뛰어나 “이 아이는 목사의 묘목”이란 얘길 들었다. 그는 한영중학 때 교목 김재형 목사가 기독교 잡지 ‘부활’을 발행했고 그 원고 정리를 도왔다. 그때 원고 ‘슈바이처의 생애와 사상’을 읽고 신앙인의 길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 시절은 식민지시대였다. 일제강점기 말 모든 교회가 폐쇄됐다. 이일선은 폐쇄 교회당 앞에서 기도했고 “너는 문이 닫힌 조선교회의 종들을 다시 울리게 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훗날 밝혔다. 그 후 서울역 앞 조선신학교(현 성남교회 자리)에 입학했다. 해방되기 전까지 방직공장에서 ‘근로동원’이라는 강제노동을 하면서 신학공부를 했다.

해방 후 그는 어머니와 함께 적산가옥인 약수동 일본 천리교 분소를 인수하고 ‘복음 전하는 집’이라고 명했다. 당시 조선신학교가 천리교 본부였고 신일 영락 경동 충무교회는 각기 그 천리교 분소 자리에서 시작됐다. 이일선은 큰 북을 앞으로 메고 어린이전도를 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아이들이 따랐다. 그는 신학교 동기동창 오길화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녀가 오르간 반주를 도왔다. 평양여자신학교를 졸업한 두 살 위의 신여성이었다. 둘은 1947년 1월 일가 김용기(1912~1988‧농촌운동가) 장로의 주례로 결혼했다.

이일선 목사(맨 왼쪽)가 가봉 선교지에서 고국으로 떠나며 슈바이처와 볼키스로 작별인사를 나누는 장면. 이 사진은 일본인 의사 다카하시가 찍었다. 간호원들이 환송하고 있다.

6‧25전쟁이 발발했다. 350여명의 교인들은 흩어졌다. 이일선도 부산으로 피난 갔고 피난지 부산 동대신동에 신광교회를 개척했다. 이 교회는 오늘날 1000여명 이상이 모이는 중형교회가 됐다. 이일선은 1951년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남편이 나병환자에 헌신하는 것을 본 오길화 사모가 기도 응답 받아 의대 진학을 권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의사가 된 목사
피난에서 돌아오니 천리교당 교회 건물이 폭격을 맞아 무너져 있었다. 새 성전을 위해 기도했다. 당시 경성전기 사옥(현 신일교회 터)을 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썼다. 1년 만에 기적처럼 이뤄졌다. 이일선의 요청과 간구를 어처구니없어 하던 경성전기 전무 현석호(국방부 장관 역임‧정치인)는 이를 계기로 신앙인이 되어 신일교회에 출석했다.

이일선은 7년여 간 교회 건축을 이어갔다. 교인들과 함께 불광동 개천에서 모래를 날랐다. 소록도 등 나환자 돌봄도 계속됐다. 그는 의대 졸업 후 슈바이처 박사와 서신교환을 했다. 그리고 슈바이처의 초청장을 받아 1958년 11월부터 가봉 람바레네병원에서 나병전문교육을 받았다.

슈바이처는 극동 오지에서 온 젊은 목사를 귀하게 여겼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듯 그렇게 이름을 주고 섬겼다. 디모데는 슈바이처의 ‘생명경외’ 사상을 온 몸으로 흡수했다. 슈바이처는 이일선을 떠나보내며 자신의 ‘기도하는 손’ 조형물을 선물로 주었다. 이 조형물은 지금 신일교회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다. 또 허름한 회색바지 한 벌, 나환자가 만든 악어와 배 조각품 등도 받았다. 슈바이처는 극동의 가난한 예수 제자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다.

이일선 목사(1922~1995)

인천 항구을 통해 어렵게 귀국, 신일교회로 복귀한 이일선은 교인들이 깜짝 놀랄 선언을 했다. “때가 되어 명령하시니 여러분과 헤어져야겠다”며 담임목사직 그만 두겠다고 했다. 교인이 1000여명에 달했던 때다. 울릉도 의료선교 위해서였다.

앞서 이일선은 울릉도 선교 이주에 앞서 포항에서 배를 타고 몇 번의 울릉도 사전 답사를 했다. 어느 여름, 울릉도를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원산 앞바다까지 밀려갔다. 멀리 보이는 뭍에 이른다 해도 월북이었다. 나환자 치료를 위해 동행하던 수녀 두 사람이 종부성사를 했다. 이일선도 마지막 기도를 했다.

“하나님, 이 죄인 혹여 살려주시면 울릉도 환자와 구령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주님 뜻대로 하소서.” 풍랑은 더욱 세차게 목선을 뒤흔들었다. 

<이일선 목사 연보>
1945. 4 조선신학교 입학
1945. 11 신당제일교회 설립(현 신일교회)
1949. 3 조선신학교 졸업
1950. 5 신일교회 초대 당회장 취임
1951. 4 피난 중 부산 신광교회 개척
1953~60 피폭된 신일교회 건축
1955. 3 서울대 의대 졸업
1958. 11 아프리카 가봉에서 슈바이처로부터 수련의
1961. 3 신일교회 사임, 울릉도 의료선교사 부임
1974. 10 인촌문화상 수상
1975. 3 루터교 비헤른봉사상 수상
1995. 2 미국 LA서 별세

울릉도=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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