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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역사여행] 인천 강화군 교동교회와 송암 박두성 선생


박두성(1888~1963)

1926년 11월 4일 훈맹정음 반포
1931년 신약성서 점역
1936년 인천 영화학교 교장
1941년 성서 점자 원판 제작
1945년 시각장애인 회람지 ‘촉불’ 발간
1962년 국민포상 수상
1992년 은관문화훈장 추서
2002년 4월의 문화인물(문화관광부)

인천시 강화군 교동도 첫 교회였던 교동교회 상용리 옛 예배당. 강화도 순례객의 필수 코스다.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으로 불리는 한글 점자 창안자 박두성은 이 교회에 출석했다. 집은 교회 앞이었다.

인천 강화군 교동도 옛 교동교회 산자락에도 가을이 깊었다. 하늘색 철판 지붕을 인 옛 예배당은 지붕틀 정면에 붉은 십자가가 선명했다. 지난 21일이었다.

옛 교동교회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다. 1899년 설립된 교동교회는 교동읍 내 성읍 안에 있다가 1933년 일제의 교회 탄압이 심해지면서 성읍에서 2㎞ 떨어진 상용리로 옮겼다. 그 상용리 예배당이 지금까지 보존됐다. 2014년 7월 1일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옛 교동교회’는 성지순례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현재의 교동교회는 1991년 옛 예배당에서 400m쯤 떨어진 곳에 건축한 예배당이다.

이 한적한 섬의 옛 예배당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한글점자 창안자 송암 박두성 선생의 모교회이자 생가 터이기 때문이다. 박두성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적극 기리는 인물이다. 지난 한글날 EBS가 ‘또 하나의 한글, 훈맹정음’이라는 다큐를 통해 송암을 기렸다. 2002년 당시 문화관광부는 송암을 ‘4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앞서 정부는 1992년 송암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송암은 일제강점기 이후 시각장애인(성서의 ‘맹인’)들에게 ‘맹인의 세종대왕’으로 존경받고 있다. 송암(松庵)은 강화도 출신 기독 독립운동가 이동휘(1873~1935)가 내린 호이다.

인천 율목동 박두성 옛집. 박두성은 1930대년부터 소천 때까지 이 집에서 성경 점자 작업을 했다.

옛 교동교회 입구에 지자체가 세운 관광안내판이 눈길을 끌었다. 전에 볼 수 없었던 팻말이었다. ‘한글점자 훈맹정음 창안자 송암 박두성 선생 생가 터’라는 제목으로 그의 생애와 업적을 적어 놨다. 인천시와 중앙정부는 학익동 송암박두성기념관 확장 및 생가 터 복원 등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기독 독립운동가 이동휘 제자

“능숙한 목수는 상한 나무도 버리지 않는다. 눈먼 사람들을 위하여 점자가 있으니 이것을 통해 무엇이든 읽을 수 있다.” 송암 어록의 한 대목이다.

상용리는 기독교 초기 신앙을 받아들인 박씨 일가 집성촌이었다. 박두성 선대가 오위장(五衛將) 벼슬로 해안을 지킬 무렵 조난당한 토머스(1840~1866) 선교사를 구해준 기록이 있을 정도다. 토머스 선교사는 성경 보급을 위해 조선에 왔다가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순교한 인물이다.

박두성은 6․25전쟁으로 불에 타버린 성경 점자 아연판 재제작했다. 이 사진은 재제작된 아연판으로 인천 학익동 송암박두성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박씨 일가는 강화·교동지역 목회자 존스 선교사와 권신일 목사 지도에 따라 신앙 일가를 이뤘다. 박두성은 1901년 존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그의 5촌 박은재 은퇴권사(강화중앙교회)가 밝혔다. 박 권사는 “그분 부친이 자식교육을 위해 교동을 떠날 때 밭 2000여㎡(600평)를 교회에 바치기도 했다”며 “9남매 중 맏이였던 박두성은 죽을 때까지 신앙인으로 살며 불쌍한 맹인을 거둔 예수의 종”이라고 말했다. 박 권사는 동생 박원재 은퇴목사와 함께 옛 교동교회를 관리하고 있다.

박두성은 이동휘가 세운 강화 보창학교 출신이다. 졸업 후 흉년이 들자 고생하던 식구들을 위해 교동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가족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일본 오사카로 가서 가게 점원을 하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심한 눈병에 걸려 고생하다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후 한성사범학교(현 경기고)에 진학, 교육을 통한 지도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한때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도 꿈꿨으나 9남매의 장남이라는 무게가 그를 주저앉혔다. 이동휘가 그를 아껴 송암이라는 호를 내린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한성사범학교 졸업 후 일제가 세운 제생원 맹아부 훈도(교사)가 된다. 맹인과 농인을 모아 가르치던 곳으로 근대 장애인교육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그는 이후 어의동보통학교, 즉 맹학교에 취직했다.

“맹학교 제자들을 만나자 인생관이 180도 변했어요. 전에는 어떻게 하면 돈 벌어서 섬에 계신 부모님 농토를 많이 사드려 잘 살게 해드릴까 했죠. 그들을 만난 후 하나님 뜻이 어디 계셔서 이 사람들은 눈을 감았나. 어떻게 하면 이들을 잘 살게 하고 기쁨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됐죠. 제 나이 스물여섯 살 때 일입니다.”

박두성이 맹인 제자들이 마련한 회갑 축하연에서 고백한 말이다. 그는 그날 제자들 앞에서 “훌륭한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께 다가간 게 아니다”며 9남매 장남으로서의 삶의 무게 때문에 교사가 됐음을 고백했다. 그것이 더 큰 박수를 받았다. 평생 허물없이 제자들과 뜻을 모아 헌신할 수 있었던 소탈함의 단면이기도 했다.

지난 24일 인천 동인천역 동쪽 700m 지점 박두성의 율목동 옛집은 인천 구도심의 한적함이 묻어났다. 40여년째 양복점을 한다는 주인이 박두성 집을 알려줬다. 1963년 박두성이 소천한 후 ‘박두성 옛집’ 주인이 몇 번 바뀌었으나 집 형태는 그대로였다.

“한때 박두성 옛집임을 알리는 팻말이 있었다”고 동네 사람들이 얘기했다. 1970년대 무렵만 하더라도 그 옛집 골목은 좁고 초가집이 많았다고 한다. 옛집은 전형적인 기와집이었다.

박두성이 부인 김경례 권사가 읽어주는 말씀을 제판기로 점역하는 모습. 그림은 이 사진을 토대로 재구성한 위인화이다. 송암박두성기념관 제공

11월 4일 훈맹정음 반포 93주년

박두성은 1913년 제생원 맹아부 근무 당시 점자 제판기를 도입해 한국 최초의 점자교과서를 출판했다. 그리고 1921년 ‘한글3·2점식 점자’를 완성한다. 조선맹아협회를 조직한 것도 이 해였다. 오늘날 시각장애인이 쓰는 훈맹정음 반포는 1926년 11월 4일 이뤄졌다. 그가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조직해 훈맹정음을 연구한 지 3년 만이었다.
그 어려운 일이 끝나자 그는 생애 두 번째 대(大)프로젝트에 나서 1931년 신약성서를 점역했다. 이후 성경전서가 이 율목동 집에서 완성됐다. 맹인들 누구나 예수 복음을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버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은 성경을 점자책으로 만드는 일이었어요. 점자 성경과 찬송을 우편으로 보내고 돌려받아 또 다른 사람에게 돌려보는 식으로 복음을 전하셨죠. 점자책이 귀한 때라 돌려 볼 수밖에 없었죠.” 박두성의 장녀 수채화가 박정희(1922~2014)의 생전 증언이다.

“6·25동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성경 점자아연판을 서울 종로5가 기독교서적센터에 옮겨 놨어요. 한데 전쟁 중 불타 없어지고 말았어요. 성경을 점자로 새기는 일은 너무나 방대했기에 부모님의 상심이 컸죠. 어릴 때부터 성경 점역 작업을 도왔던 저로서도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죠.”

박정희는 여덟 살 때부터 아버지 옆에서 성경을 읽었다. 어린 딸이 쪽복음(권별로 분리된 손바닥만 한 성경)을 읽으면 박두성이 이를 듣고 제판기를 사용해 아연판에 철컥철컥 점자를 새겼다. 어린 소녀가 졸려 반복해 읽으면 “야, 이놈아 어디 그 말이 되니. 다시 읽어보거라”라고 혼을 냈다고 한다.

1953년 무렵 박두성은 중풍으로 쓰러졌다. 하루는 기독교서적센터 임현빈 목사가 찾아와 “전쟁 통에 원판을 잃었으니 이를 어쩝니까”라고 했다. 박두성은 투병 중에도 딱 한마디했다. “다시 찍어야죠.”

박두성은 반신불수 상황에서도 아내와 딸 등을 재촉해 원판 재제작에 나섰다. 이때 합세해 일을 배운 이가 한국 첫 점역사 이경희(80)씨이다.

인천 학익동 송암박두성기념관 이용행 사회복지사가 재제작 아연판과 제판기 등 유물을 설명하고 있는 모습.

이날 오후 인천 학익동 시각장애인복지관 내 송암박두성기념관. 재제작 끝에 완성된 성경 원판이 전시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판기, 인쇄 롤러 등 다양한 박두성 유품이 산 역사로 남아 있었다.

그중 눈에 띄는 그림 한 점. 십자가 아래 박두성이 제판기를 치고 있고 부인 김경례 여사가 성경을 읽고 있다. 그 옆에서 갈래머리 한 소녀가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박정희였을 것이다. 실제 사진에 상상력을 더해 그린 위인화였다.

1963년 8월 25일 주일 오후 율목동 박두성 자택. 6·25전쟁 때 연합군과 인민군의 무수한 포격 속에서도 온전했던 그 집에서 박두성은 숨을 거뒀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포격에 집 인근이 불바다가 되었어도 그 집만은 말짱했다. 생전 박두성이 말했다. “그때 하나님이 돌보셨어.”


박두성의 지혜로운 딸 정희
박두성은 지혜로운 딸 박정희에 의해 기독 역사 인물로 남을 수 있었다. 박정희는 생전 유족으로서 추모행사와 각종 시각장애 관련 심포지움에 참석, 인사말을 할 때마다 아버지의 신앙을 얘기했다. 박두성은 교동교회를 떠나와 제생원 근무 당시 서울 정동교회를 섬겼다. 독립문 인근 천연동 살 당시 가족들을 데리고 걸어 정동교회까지 출석했다. 박정희는 “아버지가 장로, 권사 직분을 거절 하신 이유가 있어요. 아버지는 풍습에 따라 부모 권유로 10대에 조혼하고 어쩔 수 없이 이혼했는데 그것이 직분을 가지기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시곤 하셨어요”라고 회고한 바 있다. 박두성은 1930년대부터 인천 내리교회를 섬겼다. 또 아내 김경례 권사는 여신도회장을 맡는 등 신앙적 열성을 보였다.
박정희는 아버지 소천 후 ‘성경전서’ 등 점자 관련 아버지 유품과 신앙 기록들을 보관해오다 기념관 설립과 함께 이를 기증했다. 비싼 고물이 됐을 법한 ‘훈맹정음’과 점자 성경 아연판 등이 기독문화유산으로 남게 된 내력이다.

인천=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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