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소위 잘나가는 이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검·경 연예인 스포츠 스타를 소개하는 기사는 많지만 평범한 이웃들의 삶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들도 다 사연이 있고, 소중한 이야기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상수동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올해 6월인가 7월, 처음 이곳에 갔을 때 식당 주인 엄진섭(47)씨는 나비넥타이 차림이었습니다. 한여름에도 셔츠 단추를 맨 위까지 잠근 채 손님을 맞았습니다. 
‘내가 호텔이나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왔나.’ 취기 오른 상태에서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곳은 메뉴에 치킨과 두부김치가 있는 호프집입니다. 처음엔 나비넥타이가 불편했지만 그래도 이걸 차고 있으면 몸가짐을 바르게 하려고 애쓰게 된답니다.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엄진섭씨

어렸을 땐 천방지축이었답니다. 전북 김제의 시골마을에서 살았는데 여섯 살 때 불장난을 하다 초가집을 몽땅 태워먹었습니다. 

“정지(부엌의 방언)에 솔잎이 잔뜩 쌓여있었는데 할머니가 마실을 나가시면서 불장난하지 말라고 했어요.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거 있잖아요. 성냥으로 솔잎에 불을 붙였죠.” 

불길이 초가집을 뒤덮자 진섭씨는 놀라 산소가 있던 뒷산으로 도망쳤습니다. 해가 질 무렵에야 진섭씨를 찾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뽀빠이 과자를 건네며 말합니다. “가자, 진섭아.”

진섭씨의 아들 정훈과 딸 정인

27살에 결혼해 서울에 살림을 차렸습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있는데 아들은 기타리스트를 꿈꾸고 딸은 연기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 진섭씨는 혼자 울산에서 굴삭기를 몰았고, 아내는 대흥역 근처에 돈까스집을 차렸습니다. 부부는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걸 배울 수 있도록 어떻게든 돕고 싶었을 겁니다.

진섭씨와 그의 딸

굴삭기를 모는 일은 생각보다 위험합니다. 굴삭기가 겨우 서있을 수 있는 좁은 절벽에서 작업해야 할 때도 왕왕 있었습니다. 10년간 굴삭기를 몰면서 허리가 망가졌습니다. 하루종일 좁고 불편한 의자에 앉아 있다보니 허리에 무리가 간 겁니다. 3번째 수술을 한 뒤 아내와 함께 서교동에 식당을 차립니다. 가게 이름은 ‘나들목’. “사람들이 언제든지 들락날락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가게 이름을 이렇게 지었어요.”

진섭씨가 굴삭기를 모는 사진이 없어서 그냥 굴삭기 사진.

서교동엔 출판사가 많습니다. 그래서 나들목엔 출판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많이 들락날락합니다. 한 손님은 나들목이 ‘출판의 메카’라고 표현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가게 곳곳엔 책들이 많이 진열돼 있었습니다. 역시 출판의 메카.

요즘 출판업이 어렵다던데 진섭씨도 장사하는 게 수월하지만은 않습니다. 서교동에서 6년 장사하다 지난 1월 상수역 4번 출구 쪽으로 옮겼는데 올해 가게 문을 닫은 날은 딱 하루뿐입니다. 여름휴가 같은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답니다. 항상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하던 진섭씨도 이 대목에선 깊은 한숨을 내쉬더군요. 

상수동엔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으로 유명해진 식당보다 더 좋은 곳이 많습니다. 물론 상수동만의 문제는 아니고 식당하는 자영업자들 사정이 거의 비슷할 겁니다. 그래도 진섭씨의 생각은 확고합니다.

“광고에 쓸 돈이 있으면 저는 그걸 재료비에 쓰겠어요.”

나들목 외부모습

엄마들은 자식이 배가 부르다고 해도 자꾸 입에 뭘 넣으려고 합니다. 주방에 있는 진섭씨 아내는 손님을 그렇게 대합니다. 안주를 시키면 음식이 접시 위에 수북하게 쌓여 나옵니다. 

하루는 아내가 집 반찬으로 멸치볶음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어떤 부부 손님이 가게를 찾아왔는데 아내가 “방금해서 맛있는데 이것 좀 드셔보겠냐”며 멸치볶음을 내어주더란 겁니다. 음식점에 갔는데 주방 아주머니가 집 반찬을 챙겨주니 당연히 손님도 당황했겠죠. 

그런데 며칠 뒤 그 부부 손님이 손에 빵을 챙겨들고 가게를 찾아왔답니다. 이 부부는 근처에서 ‘김혜경 자연빵’이란 빵집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나들목 음식 사진. 음식들이 하나같이 산처럼 쌓여있다. 위에서부터 문어숙회, 치킨, 명품떡볶이


이것 말고도 진섭씨가 털어놓은 에피소드는 대부분 사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박종호 선생님이 스승의 날 며칠 전에 제자들을 데리고 왔던 일도 생각나고, 보리출판사 윤구병 선생님이라고 아세요? 그 분 되게 좋은 분인데 그 분도 왔다갔었고, 청소년잡지 유레카의 김지나 선생님도 들렀었어요.”

처음 봤어도 왠지 친구가 될 것 같은 손님이 있답니다. 그런 손님이 한명한명 늘어날 때마다 행복하다고 했죠. 그나저나 진섭씨는 꿈이 뭐에요?

“저는 아내와 둘이 산에서 동물을 키우며 살 거에요. 제 손으로 흙집을 짓고 앞에 조그맣게 ‘백숙’이라고 간판을 걸어 놓을 거죠. 음식 파는 식당이라기보다는 이곳에 오는 사람들을 친구처럼 대접하면서 살고 싶어요.”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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