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영이 상태가 많이 좋아진 이후에도 술 약속은 최대 주2회, 금요일은 무조건 6시 퇴근 원칙을 지키고 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저녁 약속은 안 잡을 수 없고, 일·가정 양립을 위한 최선의 방안이라고 자부해왔다.
지난 목요일 12시가 다 돼 집에 오니 두 딸이 아빠가 왔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다음날 술에 깬 뒤 아내에게 들어보니, 귀가하기 한 시간 전 쯤 아빠랑 영상통화를 한 뒤 인영이가 이랬단다.
“아빠는 술 먹고 기분 좋아 웃고 있는데, 나는 아빠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나네.”

그런 인영이에게 이번 주말은 쉼 없는 놀이머신이 되어주겠다고 다짐했다. 날도 많이 풀렸겠다 눈썰매장을 데려갈까 했는데, 세종은 눈이 오면 제설작업이 잘 안 돼 온 도시가 눈썰매장이 된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아파트 단지 뒷문 쪽 응달진 오르막길을 보니 역시 훌륭한 자연 봅슬레이장이 만들어져있었다.

토요일 오후, 이마트에서 개당 1만9900원짜리 썰매를 사서 두 딸과 출동했다. 인영이에게는 생애 첫 눈썰매였다. 아픈 이후로 감기라도 들까봐 눈썰매장 한번 못 데려갔다. 그 한을 풀려는지 인영이는 야무지게 눈썰매를 탔다. 길이가 50m는 족히 될 듯한 눈썰매장은 인영이에게 천혜의 자연이었다. 하지만 인영이를 태우고 수십번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는 아빠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였다. 몇 번 왔다 갔다 하니 온 몸이 땀으로 젖었다.

일요일에는 기분이라도 내보자싶어 소싯적 입었던 보드 복에 고글까지 끼고 눈썰매 도우미로 나섰다. 그리고 김애란 소설 ‘달려라 애비’처럼 열심히 달렸다. 시지프스는 의미 없는 돌덩이를 옮기며 괴로워했지만, 아빠는 가장 사랑하는 여인의 웃음을 들으며 행복해했다.

주말의 마지막 일상으로 아이들과 대전 어머니 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40년 전 가족사진을 발견했다. 내가 인영이 나이만할 때 어렴풋한 기억과 사진 속에는 아버지가 미끄럼틀을 태워주던 장면이 있었다. 먼 훗날, 인영이도 눈썰매에 편히 누워서 올려봤던 땀 흘리며 실성한 듯 웃던(?) 아빠의 모습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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