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란의 파독 광부·간호사 애환이야기] <6> 김에스더 집사

간호사… 양로원 원장… “한국에서 온 천사”

김에스더 집사(가운데)가 2013년 자신이 근무하는 양로원 여름축제에서 어르신의 몸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엔 청각과 시각이 오버랩된다. 회화 같았던 문구가 입체적인 조각처럼 튀어 오르며 말을 걸어온다. 친구가 신문에서 오려온 ‘파독 간호사 모집’ 광고, 그것은 깊은 울림이었다. 당시 간호학교 졸업 후 간호사로 근무 중이었다. 1974년, 마치 운명의 이끌림처럼 또 다른 인생의 짐을 꾸렸다. 20㎏ 무게의 트렁크와 100달러를 손에 쥔 채였다.

김에스더(본명 김태식·65) 집사의 첫 근무지는 베를린 훔볼트시립병원 내과병동. 그의 눈에 비친 독일은 이국적 낭만이 아닌 힘든 현실이었다. 청소와 음식 배식, 대소변 갈이, 환자 몸 씻기 등 밑바닥에서 시작했다. 가장 큰 문화충격은 음식이었다. 첫날 밀히라이스(Milchreis)를 먹을 때였다. 우유를 넣고 끓인 쌀죽에 시럽이나 설탕을 넣은 달디단 밥, 덜렁 한 접시. 긴 호흡이 필요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점차 마음의 옷깃을 여몄다.

“불평을 하다 보면 그 순간을 누리지 못하는 거잖아요. 너무 시간이 아까웠어요. 그래서 언어도 열심히 공부했고, 독일을 알고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마음의 근원은 신앙에서 비롯됐다. 그는 75년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던 어머니처럼 인자한 한국인 간호사의 전도로 예수를 영접했다. 출석하게 된 교회에서 모태신앙인 든든한 남편도 만났다. 당시 남편 한포연 박사는 경제학을 공부한 유학생이었다. 77년 결혼 후 남편은 의대로 진학했다. 남편이 6년 만에 의과대학을 마치고 전문의 과정 중 6년을 다른 도시에서 근무하는 동안 주말부부로 지냈다.

김에스더 집사

김 집사는 혼자 아이들을 키우면서 병원 근무와 공부를 하며 1인 다역을 소화해냈다. 몸은 힘들었지만 행복했다. 그에게 하나님은 삶의 동력이었다. 삶에 지치고 견디기 힘들 때마다 지지대가 돼줬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할 일이 없으리로다.’ 말씀을 믿었다.

독일에 온 지 2년 후, 외국인 중 가장 빠른 기간에 병동 수간호사가 됐다. 6년 후에는 병원 내 간호과장으로 승승장구했다.
“외국인으로 독일인들 위에 리더로 선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죠. 직원들이 절 리더로 인정해야 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어요.”

그러기에 그는 독일인들보다 몇 배의 열성으로 일했다. 직장생활 중 28년 동안은 한 번도 병가를 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걸핏하면 병가 내기 일쑤인 독일 동료들은 ‘에스더는 세상 사람이 아니다’고 혀를 내둘렀다. 근무하면서 2년간은 원장 자격을 위한 공부를 했다. 그 결과 93년 비반테스(Vivantes) 양로원 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비반테스는 병원 9개와 14개의 양로원을 보유한 거대 종합의료시설이다. 직원 수만 70명 넘는 양로원의 리더가 된 것이다.

김 집사(왼쪽)가 어르신의 손을 꼭 잡고 무대로 이동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14개 양로원 리더들이 회의를 할 때마다 유일한 외국인인 그는 철저하게 준비했다. 독일인들보다 정확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이 직위가 사람이 준 것이라면 무너지겠지만,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지키실 것이라는 생각이었어요.”

그는 양로원장으로 근무하며 아침마다 사무실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로 시작했다. 한인들에게 양로원의 시간제 일자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양로원 어르신들에게는 가장 예의바르고 친절한 원장으로 불렸다. 95년 독일에 간호보험이 도입됐을 때, 그는 BKG(Berliner Krankenhausgesellschaft·베를린병원협회) 자문위원으로 간호보험 관련 조언을 담당했다.

회사에선 그를 위해 매년 업무용 새 차를 선물했고, ‘한국에서 온 천사’라는 제목으로 병원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남편 한 박사는 일반내과와 산업의학 등 두 개의 전문의 과정을 마친 촉망받는 의사였다. 신앙심이 두터웠던 남편은 근무지를 몇 군데 옮길 때마다 첫 월급 전체를 하나님의 것으로 드렸다.

2004년은 잊을 수 없는 해다. 건강하던 남편이 대장암 선고를 받았다. 감기 한 번 걸려본 적 없던 남편이었다. 김 집사는 주님께 “남편을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다. 매일 새벽기도, 저녁에는 가족예배를 드리고 근무 중에도 금식기도로 남편의 병마와 싸워나갔다.

하지만 2008년 하나님은 남편을 데려가셨다. 남편을 잃은 통증은 김 집사를 혼란 상태로 몰아넣었다. “엄청난 좌절과 방황이 왔어요. 하나님을 원망하며 남편을 왜 데려가셨는지 묻고 또 물었어요.”

지난해 독일 베를린 한인송년회에서 파독 간호사 친구와 함께한 김 집사(왼쪽)

그날 이후 교회와 담을 쌓았다. 몇 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당시 의과대학 졸업을 2학기 남겨두던 큰딸도 학업을 포기했다. 행복이 순식간에 저만치 갔다. 김에스더 집사는 슬픔을 감추기 위해 도망자처럼 일 속에 숨었다. 퇴직 후 실의에 빠져있던 2016년 어느 날, 그에게 십자가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가장 힘든 시기에 ‘그를 업고 있었다’는 그분의 마음과 사랑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감사’라는 단어가 목구멍에서 꾸덕꾸덕 넘어왔다. 40년 전 느꼈던 첫사랑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하나님은 나의 행복을 지켜줄 지지대였을 뿐이었죠. 무엇보다 남편이 우상이었고요. 하나님은 온전히 당신 한 분만 바라보길 원하셨어요.”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슬픔은 시간 속에 풍화되지 않았다. 예수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삶의 속도를 늦추니 그분이 보였다. 의심의 안개가 걷히고 근심의 구름이 없는 그곳에 그분이 계셨다. <재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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