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나의 고향교회] “30평 작은 예배당, 종치기는 내 몫이었죠”

(下) 신평식 한교총 사무총장 전남 고흥 고소교회

신평식 한국교회총연합 사무총장이 13일 서울 종로구 한교총 사무실에서 고흥중학교 재학 시절 고소교회 앞에서 친구들과 촬영한 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우리 집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아버지의 맹장염 때문이다. 1937년 당시 맹장염은 죽을병이었다. 몇 번 굿을 해도 차도가 없자 할머니는 아버지를 데리고 휴 린튼 선교사가 건립한 전남 순천기독교진료소로 향했다. 아버지는 수술을 받고 나았다. 영육이 해방되는 경험을 하자 그날로 할머니와 아버지는 성도가 됐다.

나는 1961년 전남 고흥 고소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부모님 등에 업혀 8㎞ 떨어진 산길을 넘어 고흥읍교회에 출석했다. 동네에서 예수 믿는 몇 가정이 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담임목사도 없이 우리 집 사랑채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1965년의 일이다. 뚝딱뚝딱 집 바로 옆 공터에서 공사가 시작됐다. “아저씨 뭐하시는 거예요?” “응, 우리 동네도 인자 예배당이 있어야제.” 가을이 됐을 때 30평 남짓한 ‘고소교회 예배당’이 모습을 갖췄다.

목회자가 없었기 때문에 유창수 집사님이 주로 설교를 했다. 주일, 수요일 예배를 앞두고 종을 쳤다. 첫 종은 30분 전, 두 번째 종은 5분 전 쳤다. 유 집사님이 말했다. “평식아, 이번엔 네가 야무지게 종을 쳐 보거라.” “네.” 종치기는 특권이었다. 1분간 50번 정도 밧줄을 당기던 기억이 생생하다.

3~4년간 목회자 없이 예배를 드렸다. 30대 신학생이었던 문성회 전도사님이 초대 교역자로 부임했다. 성탄절이면 성극도 하고 트리도 장식했다.

할머니는 내 신앙의 표준이었다. 당신은 붉은색 세로쓰기 한자성경과 음표도 없는 찬송가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할머니의 찬송은 늘 음이 같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던 할머니는 내 손을 만지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식아, 너는 좋은 목사님이 돼야 한다.”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고흥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일고로 유학 갈 때도 목회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 광신대와 개혁신학연구원을 졸업한 뒤 고흥과 광주에서 목회했다. 1994년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교단의 총회신문사 근무를 시작했다. 교단통합으로 2005년 예장합동 총회본부로 일터를 옮기고 한국교회총연합으로 오기 전까지 12년간 섬겼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만 해도 우리 2남4녀는 고향교회에 매년 들렀다. 2002년 부모님이 천국으로 가신 뒤부턴 매년 고향에서 추도예배를 겸해 가족모임을 갖는다. 지난달에도 고향교회를 찾았다. 교회는 옛 자리에서 마을 입구 쪽으로 이전했다.

도회지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세속 앞에 초심이 흐트러지기도 한다. 한결같은 자세로 꿋꿋이 고향교회를 지키는 성도들의 삶을 보니 감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어마마, 인자 우리 신 목사님도 마이 늙었구마이.” 어르신들이 덥석 내 손을 잡아당겼다. 그분들을 보니 명치끝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고향교회는 교회건물보단 사람이다. 설 명절 고향에 가면 그분들은 한결같은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고향교회는 지금도 내 신앙의 뿌리다. 분주함으로 가득한 빈 가슴을 채워주는 샘물 같은 곳이다. 그곳은 나의 흐트러진 신앙을 다잡게 한다. 정리=백상현 기자

신평식 목사 약력=1961년 전남 고흥 출생, 예장개혁 총회신문 편집국장, 예장합동 총회본부 국장, 현 한국교회총연합 사무총장

백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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