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때문에 명절 같지 않았던 1998년 설
음력설 VS 양력설 논쟁이 있었던 70·80년대
선생님에게도 세배하러 갔던 60년대

어른들은 “요즘 명절이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하곤 한다. 명절 때 시골보다 도심의 쇼핑몰이 더 붐비는 모습은 이제 낯설지 않다. 고향을 하루 이틀 정도만 방문하고 도심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명절 연휴 기간 친척을 만나기보다는 해외여행을 떠나는 경우가 늘어 최근엔 명절 전후로 인천국제공항은 여행객으로 항상 붐빈다.

예전 설 명절의 모습은 어땠을까. 20년 전부터 30년 전, 40년 전, 50년 전의 설날 풍경을 살펴본다.
1997년 12월 3일 서울 정부종합청사에서 당시 임창열 경제부총리(가운데)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왼쪽),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오른쪽)가 IMF 구제금융 협상 타결을 발표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 경제를 크게 뒤흔든 ‘IMF 시대’의 시작이었다. 국민일보DB

IMF 때문에 마음까지 얼어붙었던 1998년 설

정부는 1997년 11월 21일 국제통화기금(IMF)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로 공식 결정했다. 외환위기가 공식화되는 순간이었다. 한국 경제는 얼어붙었다. 실업자 수가 1997년에 비해 1998년 거의 세 배로 불어났다. 1998년의 설날은 유독 추웠다.

경향신문은 칼럼 ‘여적’에서 “올해(1998년)는 국민 전체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이상한 설날을 맞이하고 있다. 명절이 되니 오히려 IMF 시대의 여러 고통과 우울증이 한꺼번에 몰려든다”고 썼다. 당시엔 설을 쇠기 위해 밀린 임금을 받으려는 근로자와 한 푼이라도 더 아껴보려는 사용자 사이에 말다툼과 주먹다짐이 오가는 경우도 종종 벌어졌다고 한다. 공단의 공중전화 부스에는 “올해는 찾아뵙지 못하겠다”며 전화 세배를 하는 근로자의 안쓰러운 모습도 보였다. 시골엔 자식들이 찾아오지 않아 노인들끼리 차례를 지내는 경우도 많았다.

경제가 무너지다보니 선물을 건네던 따뜻한 설 민심도 얼어붙었다. 동아일보가 한솔PCS(당시 이동통신사)가 공동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 459명 중 ‘부모나 웃어른에게 선물을 하지 않겠다’는 비율이 44%나 됐다. 전년보다 선물 비용을 줄이겠다는 비율은 57.5%였다. 어른들 주머니에서 나오는 세뱃돈도 줄었는지 현금 수요도 감소했다. 한국은행의 발표를 보면 설날 전 10 영업일 간 화폐 순발행 규모는 2조9350억원으로 전년보다 5840억원이 줄었다.

친척들과 만나 나누는 대화의 화두도 ‘경제’였다. 한겨레신문 보도를 보면 설 명절 때 만난 친지들은 “네가 다니는 회사는 괜찮냐” 등의 질문을 하며 실직하지 않았을까 마음 졸였다고 한다. 다만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으로 50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룬 데 대해 “나아지겠지”라는 희망을 조심스럽게 주고받았다.
1978년 설날 광고

설을 설이라 못 불렀던 70·80년대

현재처럼 음력 설이 공휴일로 지정된 지는 오래된 일이 아니다. 메이지유신으로 서구화된 일본은 식민지인 조선에게 음력 대신 양력설을 쇠도록 강요했다. 광복 후에도 음력설이 공식 인정되지 않다가 1960년대에는 아예 음력설이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은 신정(新正)보다는 구정(舊正)을 설 명절로 보내고 있었다. 1978년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서울 등 대도시 젊은 샐러리맨층이나 공직자들을 제외한 대다수 주민들은 음력 설날에야 떡국을 끓여먹고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며 어른들게 세배하는 전통적 민속이 아직도 뿌리 깊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면서 양력설이 무의미하다는 농어민들의 이야기를 담기도 했다. 인천수협지도과장인 남기수씨는 인터뷰에서 “해마다 신정 때는 고기가 많이 잡히는 사리 때여서 출어해야하지만 음력설은 조금 때여서 어부들도 이때만은 쉬고 있다”고 말했다. 농어촌 비율이 높았던 당시엔 음력설이 국민의 생활 패턴에 더 맞았던 것이다.

1980년대에도 음력설은 구시대 문화로 치부됐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여전히 음력설을 중시했기 때문에 결국 1985년 ‘민속의 날’이란 이름으로 정부가 공식 인정하기 시작했다. 다만 공휴일로 인정되진 않았다.

정부가 음력설도 인정했지만 ‘민속의 날’이란 명칭을 두곤 비판이 잇따랐다. 조흥윤 한양대 교수는 1988년 경향신문 칼럼에서 ‘민속의 날’에 대해 “묘한 이름”이라며 “어정쩡한 이름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양력설이 음력설을 대체한 데 대해선 “서양화를 지향하면서 우리 것에 대한 열등감이 지나치게 앞섰다”고 비판했다. 성남에 살던 김정수라는 이름의 독자는 동아일보에 기고문을 보내 “양력 정초 연휴 3일을 2일로 줄이고 구정 휴일을 2일 연휴로 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논쟁 끝에 결국 다음해에 음력설은 현재처럼 ‘설날’이름을 다시 얻고 3일의 공휴일로 지정된다.
때때옷을 입고 세배하러 가는 아이들 /경향신문 제공

선생님에게도 세배를 갔던 1968년

지금은 가까운 친척에게만 세배를 하지만, 1960년대만 해도 모든 이웃 어른에게 세배를 하는 게 예의였다. 1968년 1월30일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이날 거리는 세배 가는 때때 옷의 대열이 줄을 이었고 대부분의 상가는 철시(撤市)했다. 혼잡하던 러쉬아워의 차량의 물결도 뜸했고 영업용 택시들만이 세배 가는 손님을 찾느라 바빴다”는 내용이 있다. 음력설엔 아이들이 동네를 돌며 어른에게 세배를 하는 게 큰 행사였던 것이다.

당시엔 선생님에게도 세배를 갔다. 당시 동아일보엔 경북 의성군 비안국민학교(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스물네살의 윤정아 교사가 보낸 ‘처음 세배 받던 날’이라는 글이 실렸다. 윤 교사는 “음력설을 무시할 수 없는 시골이라 다른 날보다 일찍 퇴근을 했으나 명절 기분을 낼 형편도 되지 못해 언제나 그랬듯이 조용히 시간을 즐기고 있는데, 예고도 없이 때때 옷으로 예쁘게 차린 꼬마들이 들어오자마자 얌전하게 세배를 하지 않겠는가. … 첫 손님이라고 준비해둔 과자와 세뱃돈을 똑같이 나눠주어 제 일(一)진이 물러난 다음, 이어서 이(二)진, 삼(三)진이 밀어닥치는 데는 내 자그마한 방은 온통 꼬마 손님들로 꽉차 의외의 풍성한 손님을 맞은 셈이 되었다”라고 썼다. 정(精)과 예의가 있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는 세뱃돈을 지출한 경험을 돌이켜보며 미소 지었다면서 “즐거운 미소인지 아니면 서글픈 미소인지” 모르겠다고 위트 있게 글을 마무리 지었다.

윤성민 기자 wood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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