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의 작은 천국] 그대에게 가는 길

히말라야의 칸첸중가가 보이는 다질링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중이었습니다. 아이들은 흔들리는 버스에서 깊은 잠에 취해 있습니다. 휴대폰을 소지하지 못하도록 강제한 해외아웃리치가 재잘거리고 생기발랄하게 노는 데 아이들의 에너지를 소진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거대한 삼나무 원시림 사이로 난, 조악한 편도 1차선의 꾸불거리는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타자를 향해 경계를 넘어 그를 품는 것이 기독교다. 인도 아웃리치 중 두 학생이 포옹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내 옆에 앉아 있던 현지인이 나를 흔들어 깨웁니다. 그는 인도 북부 특유의 억양이 섞인 영국식 영어로 어눌하게 말합니다. “이 길이 인도와 네팔과 국경선입니다. 우리는 지금 국경선을 달리고 있어요.” 우리를 태운 버스는 작은 마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의 오른쪽은 네팔이고 왼쪽은 인도였습니다.

그들은 슬리퍼를 끌고, 국경이라고 부르는 그 간단한 길을 넘어 이웃나라로 마실을 갈 것입니다. 국경을 넘어 아버지의 담배 심부름을 다녀오기도 하겠지요. 물을 길어오고 나물을 뜯으러 갈 것입니다. 그 마을에서 국경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의 경계일 뿐 일상을 통제하는 엄중한 그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버스를 세우고 아이들을 마구 흔들어 깨우고 싶어졌습니다. 그곳에서 뭔가 발칙한 퍼포먼스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잠시라도 그 경계를 넘어갔다 오고 싶었습니다. 경계라는 것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케 하고 싶었습니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에게 국경선은 엄중하고 냉혹한 경계입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공간을 점유하고 이동을 통제함으로써 우리의 무의식에 거대한 장벽을 쌓았습니다. 그 경계선은 무의식에 깊이 잠재되어 일상을 통제하고 제어하는, 또 다른 경계를 낳습니다. 경계들은 사상을 감시하고 통제하였으며 사유와 신념의 지평을 가로막았습니다. 이 거대한 경계의 그물망 안에서 우리는 공포와 두려움에 떨며 경계 안에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한반도의 분단세대에게 지상의 경계선을 넘게 하는 것은 그래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이들을 마구 흔들어 깨워서 경계를 넘어갔다오게 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무의식의 층위를 만들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경계들, 그것들이 사실은 쉽게 넘어설 수 있는, 별 거 아니라는 경험과 생각은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수많은 경계에 대한 도전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은 버스를 세울 수 없었습니다. 설레는 가슴을 안고 그 길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길에 아이들을 다시 데리고 와서 국경을 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버스가 위험한 곡예를 하며 내려오는 그 시간에 나는 ‘예수님과 함께 경계 넘기’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만들고 세부적인 설계도를 그렸습니다.

김선주<영동 물한계곡교회 목사>

하나님이 신(神)의 경계를 넘어 우리에게 오신 사건이 예수님입니다. 십자가는 그 경계를 넘어오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을 문학적으로 짧게 풀어서 말하면 ‘경계를 넘는 사람들’입니다. 경계 밖에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를 품을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그러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경계를 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경계를 넘어 ‘그대에게 가는 길’입니다. 나와 다른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이 사순절입니다.

김선주 영동 물한계곡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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