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이재명] “매국적신 이완용, 내가 꽂는 십자가를 받아라”

이완용 처단 실행한 기독 청년 이재명 의사와 서울 명동성당

의사(義士) 이재명 동상. 마이산이 보이는 전북 진안군 진안읍 진안이씨 문중 재실 앞에 우뚝하다. 평북 선천 출신인 이 의사는 매국노 이완용 처단 실패 후 이듬해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됐으나 받을 후손이 없었다. 2000년 문중과 진안 지자체가 성역화에 나섰다.

‘1905~1910년에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재명처럼 개인적으로 정치에 적극 참여했다. 곧 구국기도회, 불평등조약 항의 시위, 공개 자살, 애국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 헤이그 밀사, 의병전쟁, 시장세 불납운동, 매국 친일파 암살 그리고 신민회운동 등으로 항일운동을 펼친 것이다.’

한국기독교 역사학자 옥성득 교수(미국 UCLA 한국기독교학)가 자신의 저서 ‘한반도 대부흥’(홍성사)에 밝힌 내용이다. 1909년 12월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친일파 이완용을 처단한 이재명(1890?~1910) 의사에 관한 사진설명을 하면서 이같이 썼다. 옥 교수는 이만열 전 숙명여대 교수 뒤를 잇는 한국기독교학의 권위자다.

이완용은 그해 12월 22일 오전 10시 종현성당(명동성당)에서 벨기에 총영사 주최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다 이 의사가 휘두른 칼에 어깨와 허리를 맞고 쓰러졌다. 그를 태우고 가던 인력거꾼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경호원이라고도 알려진 인물이다. 자상은 이완용의 폐를 관통했으나 명을 끊지는 못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처단하고자 했던 이재명(왼쪽 두 번째).

앞서 이재명은 그해 1월 평양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대기했으나, 의거 발생시 순종의 안위를 걱정한 민족지도자 안창호 선생의 만류로 거사를 중단한다. 이토는 그해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처단했다.

이완용 처단에 실패한 이재명은 이듬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불과 스무 해 남짓한 짧은 생애를 산 ‘열혈당’ 이재명 의사. 평북 선천 출신으로 평양 일신학교를 졸업한 기독청년 이재명의 삶은 그간 묻혀졌다. 교과서에 단 두 줄로 기억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난 삼일절 전후. 옥 교수 저술에 자극받아 기독청년 이재명을 찾아 나섰다. 스무 살, 입신양명을 꿈꿨어야 할 이 청년은 왜 죽음으로 구원에 다다르려 했을까.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도래하기를 바랐던 한 청년의 죽음. 그러나 정작 한국교회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재명에 대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으로 봉인해 버렸다. 예배당 안에서 동방요배를 하고 교회를 나서면 신사참배를 했던 한국교회가 이재명의 삶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을 것이다.

기독청년 의사(義士), 부끄러운 한국교회
한반도 남쪽에서 이재명의 ‘흔적’을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었다. 삼일절 오후 찾은 명동성당 앞 ‘이재명 의사 의거터’ 표지석이 유일했다.

이 의사에게 절대적 영향을 준 안창호(가운데)와 그 삼형제. 독립협회 평양지회 활동 무렵이다.

흔적이 없는 건 평북 선천 출신이고 평양에서 공부했기 때문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1904년 미국노동이민사(移民社)를 통해 하와이를 거쳐 미 본토까지 가 안창호 선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항일단체 일원으로 경성 제물포 원산 평양 간도 블라디보스토크 도쿄 등에서 풍찬노숙을 했던 그의 흔적이 없는 게 의아했다.

지난 주말. 이재명은 뜻밖의 곳에서 동상으로 남아 또 풍찬노숙을 하고 있었다. 마이산이 보이는 전북 진안군 진안읍 진안이씨 재실 앞에 쓸쓸히 서 있었다. 동상 옆쪽으로 ‘독립운동 이재명 의사 성역화’ 단지가 조성돼 있었다. 의열사, 기념관, 관리사무실 등 제향을 위한 건물이 다섯 채였다. 건물 뒤로는 배산임수에 기댄 진안이씨 선대 묘지가 즐비했다. 이재명은 진안이 본관이다.

이나마 기념될 수 있었던 것은 1962년 이재명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면서다. 그 훈장을 받을 후손이 없어 정부가 보관하고 있자 2000년 진안이씨 대종중이 나서 이 의사의 유지를 잇겠다고 훈장증을 받았다. 성역화에 국고 등이 지원됐다. 분단은 이처럼 수많은 열사들을 ‘반쪽 독립운동가’로 만들고 말았다.

의열사 안 영정 앞엔 향로 등이 갖춰져 있었다. 사당 마루는 먼지가 쌓였고 삐걱거렸다. 동상 옆과 성역단지에 나부끼는 태극기가 비장함을 주었다. 이재명에 대한 기독교 시각의 연구도 찾지 못했다. 일반 논문도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 시도에 관한 연구’ 정도로 극히 적었다. 그가 과연 크리스천이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이재명 의사가 다닌 것으로 추정되는 평양 남산현교회.

그때 한 권의 책이 그를 알아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소설가 박상우 작품 ‘칼’(2005년·창해)이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아름다운 열혈청년, 칼로써 무너지는 시대를 바로잡으려 했던 대한의사 이재명’. 중진 작가 박상우는 서두에서 ‘그에 관한 기록과 자료는 참담할 정도로 부실하고 부정확했다’며 일대기의 재구성을 미안해했다. 사실 그의 생년조차 여러 개여서 생몰 나이를 20~23세 사이로 추정할 뿐이다.

‘그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인력거에 앉은 이완용의 어깨를 찔렀다. 그 순간 얼굴이 창백한 매국적신의 얼굴을 그는 분명히 보았다. 그가 본 것은 다만 사랑을 모르는 한 인간의 나약하고 비굴한 표정일 뿐이었다. … “가련한 매국적신, 내가 꽂는 십자가를 받아라!”’(‘칼’ 128쪽)

소설은 사실(fact)을 기반으로 했다. 그렇다면 이 팩트는 누가 알아냈을까. 40년 이재명 연구자가 있었다. 경기도 부천에 사는 서지전문가 김성렬(62) 선생이었다. 기독청년 이재명의 일대기를 연구하고 박 작가에게 자료를 제공했다.

매국노 이완용(가운데)이 아들 이항구(뒷줄 가운데), 손자들과 찍은 사진.

“1975년 12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동네 음식점 목로를 두고 한 80대 백발성성한 노인과 마주하게 됐는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교수형당한 이재명 의사의 삶을 이야기하며 추모받지 못하는 현실을 분개하시는 겁니다. 교수형에 처해진 직후 이 의사의 부인 오인성 여사가 서럽게 우는 대목을 설명하시는데 고대 시가 ‘공무도하가’와 다를 바 없었어요. 의거 당시 20대였을 그 노인은 오 여사 일가붙이거나 이 의사 동지였지 싶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소명을 받은 듯 이 의사의 삶을 추적했다. 남산 국립중앙도서관, 청계천 헌책방 등을 뒤졌다. 이 의사와 기독 신여성 오인성과 관련된 사료가 있다면 어디든 찾아갔다. 유명 출판사에 취직한 것도 “반쯤은 이 의사의 사료 찾기가 쉬울 것 같아서였다”고 했다.

“나는 부활해 일본 너희를 망하게 할 것이다”
그의 연구에 근거하면, 이재명은 태어나던 해 아버지를 잃고 평양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어머니가 양부와 재가했다. 그리고 1894년 평양이 청일전쟁으로 불바다가 되자 함경도 북청으로 피난했고 전쟁이 끝난 후 돌아왔다. 하지만 어머니가 산후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다. 양부는 이때 그를 수길에서 재명으로 개명하고 평양 미션스쿨 일신학교에 입학시켰다. 신앙을 갖게 되었고 훗날 집사 직분을 받는 계기였다.

이후 선교사 등이 주도해 하와이 이민노동자를 모집하자 공부를 더할 겸 이에 응했다. 이 무렵 서북 출신 기독교인 안창호를 만나 민족현실에 눈뜨게 된다. 하와이에서 교회 활동을 하던 그는 안창호가 주도한 독립운동단체 공립협회 활동을 위해 미 본토 샌프란시스코로 들어간다. 이재명에게 동향 출신 안창호는 스승 이상이었다.

당시 소설가 김동인은 ‘간다 간다 나는 간다’라는 글에서 평양 대성학교 교장 안창호와의 기억을 적었다. “그의 누이(안신호)가 진남포교회 김성택 목사의 안해로 우리 집과 이웃했는데…도산도 가끔 누이 집을 찾았다”고 기록했다. 대성학교는 선천과 평양 기독교인들이 주축 된 신민회원이 이끌어간 학교로 오산학교와 함께 민족교육의 요람이었다. 신민회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와해된다.

서울 명동성당 앞 ‘이재명 의사 의거터’ 표석. 강민석 선임기자

1907년 이재명은 헤이그 밀사 사건이 실패로 끝나고 이준 열사마저 순국하자 샌프란시스코 재미동포 공동회의 석상에서 위국헌신을 맹세하고 매국적(賣國敵) 숙청을 결의한다. 그리고 그해 도쿄를 거쳐 귀국해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를 돌며 동지를 규합한다.

그의 열혈적 삶은 김성렬 선생이 사료로 정리해 놨다. 이재명이 직간접으로 활동했던 무대인 평양의 일신학교 대성학교 남산현교회, 하와이 교회,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 제물포(인천) 내리교회 등은 김성렬 선생의 노고로 밝혀졌다. 때문에 이재명의 신앙을 알아가는 씨줄날줄이 됐다.

무릇 이재명 의사는 기독교 토양 위에서 자란 약관의 청년이었다. 외세와 친일 권력에 의해 처형된 순교자이다.
한편 살아남은 이완용은 1910년 8월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 이후 3·1운동이 들불처럼 번지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세 차례에 걸쳐 경고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10년 9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이재명의 교수형이 집행됐다. 앞서 그가 사형 판결을 받은 날 법정에서 이렇게 외쳤다.
“나는 죽어 수십만의 이재명으로 부활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


이재명의 처 오인성 여사
1890년생으로 추정. 부모는 평양에서 정미업을 했고 다섯 자매를 두었는데 그중 맏딸이었다. 평양 성모여학교 졸업 후 재령 진초학교 교사가 됐다. 이재명 의사 의거 당시 양심여학교(동덕여자의숙과 통합) 생도였다. 결혼은 1908년 성모여학교를 다닐 때로 이 학교 교사 등이 이 의사를 소개해 이뤄졌다.

이 의사 순국 후에 성재 이동휘 선생의 두 자매와 함께 성진 보신여학교, 간도 양정여학교 교사를 지냈다. 연해주 간도 상하이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으며 3·1운동 소식을 듣고 동참하려 환국했으나 급서하고 말았다.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있다.


이재명(1890?~1910)
1888~1890년 사이 평북 선천 출생. 부 사망
1904년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
1906년 샌프란시스코 ‘한인공립협회’ 가입
1907년 재미동포 공동회에서 매국적 숙청 결의
1909년 12월 22일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 습격
1910년 5월 18일 사형 판결
1910년 9월 13일 사형 집행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진안=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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