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루트임팩트 제공

페미니즘은 ‘빨간약’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파란약은 지금의 생활에 안주하는 삶을, 빨간약은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주는 매개로 등장한다. 알면 알수록 불편해지는 페미니즘과 여성주의는 빨간약에 가깝다. 이것을 논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여태껏 차별을 받아온 역사와 그 사회적 구조, 배경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명절에 그 많은 음식과 설거지는 왜 엄마들이 다 하는 걸까?
·10년 차 이상의 경력직부터는 왜 여성이 거의 없는 걸까?
·나는 누군가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루에 몇 번이나 할까?

너무나 당연하고 지극히 평범했던 일상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다시 생각해볼 때다. 매년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올해 110번째 여성의 날을 맞아 지난 10일 서울 성수동 ‘루트임팩트’에서 ‘시간을 달리는 소녀: 사라진 여성들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컨퍼런스가 열렸다.

2012년 문을 연 루트임팩트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을 ‘체인지메이커’라고 부르며 그들의 일과 삶, 배움을 지원하는 소셜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 컨퍼런스에서는 여러 체인지메이커가 여성의 일과 삶, 배움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눴다.

사진 = 루트임팩트 제공

여성의 배움

여성은 차별을 체감하기도 전에 학교 안팎에서 고정된 성 역할을 학습한다. 이 과정을 통해 편견이 형성되고 때로는 무감각해진다. ‘고정관념 위협(Stereotype Threat)’이라는 말은 고정관념의 영향으로 수행 능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는 상황을 뜻한다. “여자는 남자보다 수학을 못한다”는 고정관념을 여성에게 이야기하면, 여성은 잠재력이 있는데도 실제로 수행능력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방식에 따라 사회화되곤 한다. 부모의 말과 행동이 아이의 가치관 형성에 매우 큰 영향을 준다. 모두가 성별이나 장애, 가정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되려면 아주 어릴 때부터 성 인지 교육과 인권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여자니까 태권도는 안 돼. 남자니까 핑크색 인형을 갖고 놀아선 안 돼”라는 식의 고정관념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아이와 부모가 함께, 성인들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 사회 전반의 고정된 성 관념과 편견을 남녀 문제가 아닌 ‘개인 차이’로 인식하도록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고 컨퍼런스 참가자들은 강조했다.

고려대 교육학과 이보라 교수는 “가정, 학교, 회사에서 어떻게 고정된 성 인식을 바꾸어나갈지 다양한 각도에서의 개입과 고민이 필요하다”며 “이 개인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는 교육을 통해 남자와 여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소수자와 다수자가 모두 함께 ‘동행’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을 떠나 ‘나답게’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성의 일

일하는 여성은 한 번쯤 경력단절, 유리천장, 육아휴직, 임금차별 등을 고민한다. 모두가 일하기 좋은 환경, 성별에 관계없이 여성과 남성 모두 소속감을 느끼며 차별 없이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을까?

고려대 글로벌경영학과 송수진 교수는 “우리나라에 경력단절 여성(경단녀)이 50만명 이상인데, ‘애 키우면서 누가 나를 불러줄까’ 하는 생각에 퍼포먼스가 좋고 직업 윤리도 뛰어나다”며 “이미 경력이 단절된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는 경력 단절 여성의 재취업 문제와 더불어 경력이 시작되지도 않은 어린 여성들의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경력의 단절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문화나 방식을 구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하는 여성을 위한 소셜 클럽 ‘언니의 社생활’ 창업자인 이나리 대표는 여성의 경력 단절 문제와 관련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그는 “여성이 커리어를 직장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면 답을 찾기가 힘들다”면서 “100세 시대에 직장을 중심으로 나를 훈련시키며 아슬아슬한 균형을 찾는 것이 과연 답일지 개인이 근본적인 질문들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의 사회는 한 사람을 뽑아서 끝까지 책임지지 않고, 많은 것이 프로젝트 단위로 변해간다. 정부는 직장이 아니라 이러한 프로젝트(일) 중심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정책에 반영해야 하며 ‘비정규직이라서 못 누린다’가 아닌 ‘비정규직이라도 기본적 사회보장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개인적, 사회적으로 우리가 일을 바라보는 생각과 방향성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문제 해결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연대해서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 루트임팩트 제공

여성의 삶

‘일과 삶의 양립, 육아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담은 매거진 ‘볼드 저널’ 김치호 발행인은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고 있는 여성들에 대해 설명했다. 2017년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일가정양립지표’에 따르면 국내 맞벌이 가구 비율은 45%에 달하지만 기혼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하루 평균 45분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짧다.

육아와 가사는 여전히 여성에게 많은 짐을 지우고 있고, 결국 결혼과 출산 후 엄마는 회사를 관둔다. 우리나라 기혼 여성 취업자 551만8000명 중에서 경력 단절을 경험한 여성은 255만5000명에 이른다.

그는 전통적인 남녀 역할 구분과 그에 따른 상식 수준의 삶의 기술이 제대로 습득되지 않음을 여성이 사회에서 사라지는 이유로 꼽았다. 가부장적 제도와 습관적 남녀 역할 구분에 의해 여성이 ‘자기 돌봄’과 ‘자기 계발’ 등 스스로를 가꾸는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하고 뒤처진다는 것이다.

그는 기존의 습관적 남녀 역할 구분에서 벗어나 여성이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 수준의 역할 분담이 필요하며, 여성이 스스로를 돌보는 삶의 기술을 터득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여성의 배움, 일, 삶 그리고 ‘체인지메이커’

허재형 루트임팩트 CEO는 “이 컨퍼런스는 여성의 일과 삶, 배움에 있어 즉각적인 솔루션과 단편적인 대안을 내기를 지양한다”고 못 박았다. 그는 “솔루션보다는 이해와 공감, 뜻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우리의 무의식에 경종을 울려 ‘여성’ 이슈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이 높아지는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여성 문제에 성급히 해결 방법을 제시하기보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으로 균형적 시각을 갖는 계기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일과 삶, 배움은 끊어지지 않는 물줄기 같다. 사회의 만연한 성 역할 고정관념, 이를 바탕으로 한 학습이 한 여성이 자라서 일을 선택하고 삶을 살아가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여성 문제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생애 전반에 걸친 통합적인 관점과 접근이 필요하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사라진 여성들을 찾아서’와 같은 컨퍼런스를 통해 사회적 감수성이 한층 높아진 ‘체인지메이커’들이 많아질수록, 여성, 소수자, 더 나아가 남성 모두에게 더 많은 선택권이 주어지는 더 나은 세상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현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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